엜문학)엘리오스에서의 말년 휴가
IN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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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2.02.1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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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브 4라인이 나오고서 조금 지난 10월, 휴가를 나왔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친구가 엘소드에 복귀했다기에 저도 잔뜩 상기된 마음으로 동참했습니다. 엘소드 4라인이 출시된다는 예고를 저번 휴가 때 확인한 후로, 그 게임은 제 머리 한 켠을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아티스트 ‘요루시카’의 곡 
「그래서 나는 음악을 그만두었다」에는
 [辞めたはずのピアノ、机を弾く癖が抜けない]
 [그만둘 셈이었을 피아노, 책상을 두드리는 버릇이 고쳐지지 않아]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제 경우 비록 피아노가 아니라 조롱받는 온라인 게임이었지만,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오른손은 방향키를, 왼손으로는 ‘루나 블레이드-(활력on)-피닉스 텔런-소드 파이어-스플래시 익스플로전' 콤보를 허공에 대고 더듬거리곤 했을 정도로 제 무의식은 아직도 그곳에서의 습관을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초중고 어느 시기이고 저는 때때로 엘소드를 회상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2017년 3차 전직을 하고 떠난 지 어언 4년. 저는 엘리오스로 돌아온 것입니다.




 친구는 이벤트 접속 보상으로 받은 가열기에서 레어아바타의 악세사리가 나왔는데, 그걸 팔아서 20억 가까이를 챙긴 듯, 훤칠하게 레어 아바타 세트를 차려입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꼭 그게 이유가 아니더라도 친구가 육성하던 이브의 신전직은 메리수 냄새가 풀풀 나는 병기(兵器)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각성 시에 보이는 웃음에는 지난 세월 간 굳어졌던 이브의 이미지를 싹 쇄신하는 듯한 매력이 있어서 저도 마음이 동했지만, 7살 때 엘소드를 접하고 몇 번인가의 언인스톨과 복귀를 반복한 저였음에도 이브는 1차 전직 이상의 육성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여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런 유아적인 액션 RPG로 자신의 궁핍한 아이덴티티를 채우려는 전형적인 남캐충인 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유로 가장 애정이 가고 지금껏 한 손으로는 셀 수 없을 만큼의 육성 경험이 있는 엘소드의, 제네시스 라인을 육성하기로 했습니다. 저와 친구는 당돌하게도 PC방에 나란히 앉아 엘소드를 했는데, 친구는 운동을 하고 몸도 어딘가 듬직한 느낌이 있어서 뒤에서 배그를 하는 고등학생 무리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래도, 신나게 떠드는 와중에 알바가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올 땐 역시나 저도 무안해져서, 당장 알트탭으로 유튜브에 들어가 쇼미 10의 아무 적당한 노래라도 재생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끼기는 했습니다.

 엘더였나 베스마부터 친구의 안티테제가 합류해 던전을 싹싹 청소해주었습니다. 그림물감의 물방울이 떨어지듯이-혹은 캬바레의 조명이 번쩍번쩍 켜지듯이-분홍색 원이 번져가는 스킬을 보고 있자니 이 2단 점프도 없는 캐릭터가 몹시 하찮게 보였지만, 아직 1차다, 2차다, 아직 초월이다하며 그렇다 할 활약도 없이 레벨을 올려나갔습니다. 제네시스 라인의 초월 일러스트는 특히나 무슨 스킬컷 같이 붕 뜬 느낌이 있어서, 저는 점점 더 아직 닿지 못한 3차 전직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게 되어갔습니다. 친구의 안티테제를 보며 자랐기 때문인지, 제 보상심리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일이었는지 이튿날이었는지, 아마 이튿날에, 저는 3차 전직을 했습니다.

 일러스트에서 풍겨오는 절대자의 오라, 스탠드 모션은 공중에 떠있는데다 기간제 온천 한 벌 아바타를 입고 다니던 저에게 각성시 형태변환은 이 멋쟁이들의 사회에서 오는 수치심의 장막이 되어주는 것이었습니다. 3차 스킬은, 없었습니다. 마스터 스킬이라고, 따로 뭔가를 또 해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분명 4년 전에도, 3차를 하고 나서 한 거라곤 훈련장 바닥에 루나 블레이드로 불을 지른 게 전부였습니다. 저는 어쩐지 옆 동네의 잘 나가는 게임-여기선 M이라고 해두겠습니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버티지 못하고 그 무렵 이벤트로 증정하던 직업변경권을 사용했습니다. 바른대로 말하자면 반쯤 도피였습니다. 이곳이 아니라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릅니다. 중학생 때 2년 정도 룬 슬레이어를 했었고, 자랑이 못 될 거란 걸 알면서도 굳이 말하자면, 바로 고꾸라지긴 했으나 대전 SS랭크를 달성한 경험도 있습니다. 저는 엘소드를 했던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이 더블에스의 이야기를 꺼내곤 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몇 년 만의 룬 마스터, 몇 년 만의 소드 파이어, 몇 년 만의 스톰 블레이드. 그런데, 그 스톰 블레이드는, 주인을 잃은 채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세계가 갈 데까지 가버렸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공을 깨려고 하면 엘의 여인에게 한 방에 나가떨어졌고-친구는 옆에서 먼저 죽여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리고모르에 갔을 때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포션을 마시는 족족 마나통이 바닥을 향해 전력질주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길드에 들어간다거나 인터넷으로 조사를 했다면, 그런 식으로 벽을 느끼지는 않았을 거란 걸 지금에 와서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시 그런 조사를 조금도 하지 않았기에, 리고모르에 한 번 발을 들이고나서는 이후부터 모든 던전이 그런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제게는, 주위를 돌아볼 여유라는 게 조금도 없었던 겁니다.

 매일 같이 피시방에 틀어박혀 하루를 보내는 사이 제 육신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두통은 기본으로 틱이라도 있는 것처럼 쉴새 없이 왼쪽 눈을 깜빡거린다거나, 지하에 위치한 피시방의 탁한 공기 탓인지 히터가 틀어져 있는데도 물 같은 콧물이 흐르고 목에서는 가래가 나오는, 그야말로 폐인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고작 7박 8일로 나온 휴가였습니다. 저는 그러지 않으려 해도 무언가에 쫓기듯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처럼 여유라는 성격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로 휘청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혼돈 속에서 에잇, 그만, 하고 눈을 감아버리기로 했습니다.

 복귀를 이틀 앞둔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택시 안에서 ‘눈이 뻑뻑해지니 이제 엘소드는 못 하겠다.’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친구는 “레이드도 돌고! 강화도 해야지!”하며 아쉬운 기색을 보이고는 “엘소드 할 때만 눈이 그래?”라고 질책하듯 말을 끝맺었습니다. 이 무슨 요상한 일인지 리그에서 챔피언들이 싸우는 게임을 할 때는 눈이 그럭저럭 버틸만했던 것입니다.

 저는 ‘적당히’를 몰랐던 걸까요? 게임을 게임으로써 즐기려 하지 않고 너무 많은 걸 바랐던 건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엘리오스가 퇴색되어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지금 와서는 일주일 좀 되는 휴가로 엘소드에 복귀할 생각을 했다는 게 어리석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저는 전역이 앞으로 40일이 조금 넘게 남았습니다. 입대가 코앞으로 다가온 친구는 엘소드에 흥미를 잃었고, 입대한 11월 말부터 연락이 끊겼습니다. 제 자취방에는 데스크탑도, 인터넷도 없지만 그래도 저는 엘소드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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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사지방에 앉아 적었던 소설입니다. 지금은 전역해서 집입니다. 읽어주실지 모르겠으나 전역 후의 엘소드 이야기도 곧 올리겠습니다. 입대하시는 분도 복역 중에 계신 분도 무사히 전역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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