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금조Lv.99
- 작성일 2026.09.15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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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축제날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평소라면 새벽부터 들려왔을 새들의 울음도, 숲을 가로지르던 정령들의 장난스러운 기척도 오늘만큼은 드물었다. 잠든 것은 아니다. 그저 모두가 쉬고 있었다.
삼 년에 한 번, 태양과 달이 하나의 하늘에 걸리고 낮과 밤의 경계가 흐려지는 날. 엘리오스 전역의 생명들은 이날만큼은 싸움을 멈추고 자신들을 품어온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존의 축제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것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욱 이 날을 기다렸다. 싸울 이유가 없는 하루. 칼을 내려놓아도 되는 하루. 누군가는 가족과 식탁에 앉고, 누군가는 오래 만나지 못했던 사람을 찾아간다. 엘프들은 숲으로 돌아가 정령들과 노래했고, 인간들은 마을마다 작은 축제를 열었다.
평화를 확인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곳에 가지 않았다. 축제가 시작되기도 전인 이른 새벽, 아직 빛이 완전히 숲을 비추기 전부터 혼자 길을 나섰다. 익숙한 길이었다. 발밑의 나뭇가지 하나 밟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 지도에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오래된 숲이었다. 이곳에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찾아온다.
바람에 반쯤 파묻힌 부러진 화살 하나, 나무뿌리 사이에서 녹슬어 가는 작은 장식, 오래된 검집의 조각. 그리고 몇몇 나무에 남아 있는 깊은 검흔.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질 것들이다. 비가 내리고, 눈이 쌓이고, 나무가 자라면 언젠가는 이곳에서 누군가 싸웠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겠지.
나는 나무 한 그루 앞에 멈춰 섰다. 굵은 줄기의 옆면에는 여러 개의 작은 흠집이 남아 있었다. 검을 처음 다루던 사람이 만든 것처럼 일정하지 않은 흔적이었다. 하지만 위쪽으로 갈수록 점점 날카롭고 깊어진다.
손끝으로 그 자국을 천천히 쓸었다.
차갑다.
나무껍질인데도 마치 아주 오래된 금속을 만지는 것 같았다.
허리춤의 에렌딜이 희미하게 울렸다. 공명이라 부르기에도 작은 떨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곳에는 아직 남아 있다. 지난 시간의 흔적이. 에렌딜을 사용했던 자들의 기억과 엘드랏실을 지켰던 이들의 의지, 그리고 내가 직접 기억하는 사람들의 흔적까지.
나는 눈을 감았다. 오늘 같은 날이면 이상하게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실제로 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도.
천천히 무릎을 굽혀 흙 위에 작은 화살 하나를 내려놓았다. 새것이었다. 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 활시위를 당길 생각도 없는 화살. 오늘을 위해서만 준비한 것.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저는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당신들의 힘을 빌리고 있습니다."
내 목소리가 숲에 낮게 흩어졌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이것이 옳은 것인지, 때때로 모르겠습니다."
손끝이 화살의 깃에 닿았다.
"제가 강해질수록, 제 곁의 사람들은 더 안전해지는 걸까요. 아니면 그저 제가 더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 것뿐일까요."
나는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바람이 한 번 불었고, 나뭇잎이 흔들렸다. 그게 전부였다.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죽은 자에게 답을 구하는 건 살아 있는 자의 욕심일 테니까. 그저 오늘 정도는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아직 여기 있다고. 그리고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그때였다.
"그렇게 혼자 고민하면 힘들 텐데."
손이 에렌딜의 손잡이를 잡았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시에 몸을 돌렸고, 활 대신 검을 택했다. 목소리는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누군가 기척을 숨긴 채 이 거리까지 접근했다는 뜻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에렌딜을 절반쯤 뽑은 순간, 나는 멈췄다.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긴 머리. 익숙한 눈. 익숙한 얼굴. 귀의 모양과 체격, 심지어 손가락의 길이까지.
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보며 두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거울이라면 설명이라도 된다. 저건 나였다.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내 것과 같은 색이었다. 그런데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빛.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였다. 그녀 주변에는 이상할 만큼 부드러운 정령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숲이 그녀를 경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기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검을 완전히 뽑았다.
"누구지?"
그녀가 움찔하더니 두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잠깐. 싸우려고 온 건 아니에요."
"질문에 대답해."
"그러려고 했는데……."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지금 조금 놀라서."
"……."
"정말 닮았네요."
"장난할 생각이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어."
"장난 아니에요."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제야 나도 알 수 있었다. 경계와 당혹감, 그리고 아주 조금의 두려움. 나와 같은 얼굴이 그런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는 건 기묘했다.
나는 검 끝을 내리지 않았다.
"이곳에는 어떻게 들어왔지?"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정말이에요. 눈을 떴더니 숲이었어요."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안 믿을 것 같긴 했어요."
태연하다. 아니, 태연한 척하는 건가. 판단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녀의 자세를 살폈다. 중심이 흐트러져 있지 않았다. 언제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자세. 무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비전투원은 아니다. 오히려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내가 거리를 잡는 방식, 상대의 손과 발을 동시에 확인하는 시선, 숲에서 적의 위치를 가늠하는 작은 움직임. 전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게 하니까.
"무기를 보여."
"네?"
"숨긴 무기."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허리 뒤쪽을 보여주었다. 활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궁수군."
"당신도요."
"검을 들고 있는데?"
"손을 보면 알아요."
그녀가 내 오른손을 가리켰다.
"활을 오래 쥔 사람 손이에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조금 웃었다.
"역시."
"뭐가?"
"나랑 비슷하니까요."
또 그 말이다. 나는 검을 천천히 내렸다. 하지만 집어넣지는 않았다.
"이름."
"먼저 물어본 사람이 먼저 말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잠깐 버티더니 금방 두 손을 들었다.
"알겠어요, 알겠어요. 그렇게 노려보면 무섭다니까요."
무섭다는 사람치고는 말이 많다.
"그래서?"
그녀가 입을 열려다가 멈췄다. 그 순간, 나도 생각했다. 내 이름을 말하면 어떻게 되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내 이름까지 알고 있다면. 혹은 같은 이름을 말한다면.
나는 지금 그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말했다.
"황혼."
"황혼?"
"그렇게 불러."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내가 본명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캐묻지 않았다. 왜 본명을 숨기느냐고, 그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아무것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방금 전까지의 존댓말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지적하려다가 그만뒀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그럼 나는……."
조금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시선이 한 번 하늘로 향했다. 동쪽 끝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새벽."
"……새벽?"
"응. 황혼 다음에는 새벽이잖아."
나는 무심코 그녀를 바라봤다. 진심인가.
"황혼 다음에는 밤이다."
"아."
그녀가 정말 처음 알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
"그렇네."
"그것도 모르고 이름을 정한 건가?"
"알고는 있었는데."
"방금 표정은 전혀 아니었어."
"그건 넘어가 주면 안 돼?"
"안 돼."
새벽이 잠깐 입술을 내밀었다가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그럼 밤까지 기다려야 해?"
"……무슨 소리지?"
"황혼 다음에 밤이 온다면, 새벽이 오려면 조금 기다려야 하잖아."
"이름 하나에 뭘 그렇게 복잡하게……."
"괜찮아."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웃었다. 아까까지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 웃음이었다.
"기다리는 건 자신 있으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이 조금 오래 귀에 남았다.
"그럼 오늘부터 나는 새벽이야."
마치 대단한 결정을 내렸다는 듯 말했다.
"마음대로 해."
"응. 마음대로 할게, 황혼."
그리고 정말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즉시 한 걸음 물러났다. 새벽이 멈췄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가 처음 서 있던 자리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이 정도?"
"뭐가."
"거리."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싫으면 더 갈게."
"……됐어."
"알겠어."
그녀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이상했다. 사람은 보통 두 종류였다. 거리를 두면 더 멀어지거나, 그 거리를 억지로 좁히거나.
저 여자는 둘 다 아니었다. 내가 그어놓은 선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넘어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떠나지도 않는다.
나는 검을 집어넣었다.
"당분간 따라와."
"응?"
"네가 무엇인지 확인해야겠어."
"사람인데."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야."
"너무하네."
말과 달리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화살을 한 번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이곳은 아주 조용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혼자 왔고, 혼자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 옆에 이상한 여자가 하나 서 있다. 그것도 내 얼굴을 하고.
"황혼."
"왜."
"여기는 어떤 곳이야?"
"말해줄 이유가 없어."
"그렇구나."
끝이었다. 다시 묻지 않는다.
나는 걸음을 옮겼고 새벽이 따라왔다. 몇 걸음 뒤에서.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고, 잊어버리기에는 가까운 거리였다. 숲을 빠져나가는 동안 새벽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처음의 말 많은 모습 때문에 계속 말을 걸어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가끔 주변을 둘러보고, 정령이 가까이 오면 손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정령들은 그녀를 피하지 않았다. 작은 바람의 정령 하나가 새벽의 손가락 끝에 앉았다.
"어."
그녀가 아주 작게 웃었다.
"안녕."
나는 걸음을 멈췄다. 정령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다시 숲속으로 사라졌다. 새벽이 나를 봤다.
"왜?"
"아무것도."
"방금 나 보고 있었잖아."
"착각이야."
"그런가?"
"그래."
새벽은 쉽게 수긍했다. 그것도 이상했다. 보통은 더 물을 텐데.
"황혼."
"이번엔 또 뭐지."
"오늘 뭐 하는 날인지 알아?"
"공존의 축제."
"여기도 똑같구나."
나는 발을 멈췄다.
"여기도?"
새벽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으로 그녀가 실수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
"말해."
"내가 있던 곳에도 있어."
"공존의 축제가?"
"응."
"삼 년에 한 번?"
"응."
"태양과 달이 겹치는 날."
새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변신, 환각, 정령의 장난, 마족의 술식, 기억 조작. 가능성을 하나씩 떠올려봤지만 어느 것도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가능성.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가설을 입 밖으로 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건가."
새벽이 난처하게 웃었다.
"아마도."
"그걸 쉽게 인정하네."
"다른 설명이 있어?"
"……없어."
"그럼 일단 그걸로 생각해야지."
단순하다. 하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다시 걸었다.
"어디 가?"
"마을."
"같이 가도 돼?"
"이미 따라오고 있잖아."
"허락받고 따라가는 거랑 그냥 따라가는 건 다르잖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마음대로 해."
새벽이 웃었다. 또 그 웃음이다.
"응."
몇 걸음을 더 갔을 때 새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황혼."
"또 왜."
"아까 말했던 거."
"뭐."
"기다리는 거."
나는 그녀를 돌아봤다. 새벽은 숲 사이로 내려오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와야 새벽이 온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냥."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밤이 좀 길어도 괜찮다고."
"……."
"새벽은 없어지지 않으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벽도 더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걸었다. 숲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공존의 축제날에는 태양과 달이 겹친다. 빛은 있는데 밝지 않고, 어둠은 있는데 완전히 캄캄하지 않다. 나는 문득 그것이 황혼과 비슷한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래를 새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한 여자가 걷고 있었다. 나는 조금 걸음을 늦췄다. 이유는 없었다. 뒤에서 걷던 새벽이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지만, 그래도 두 걸음. 그 거리는 유지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말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뿐이다.
정체를 확인하고, 이 세계로 온 이유를 알아내고,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 그것뿐이다. 그러니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걸음을 늦춘 것도, 그녀가 두 걸음의 거리를 그대로 지킨 것도. 그리고 숲을 벗어나기 직전, 문득 뒤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사라졌을 때 내가 무심코 뒤를 돌아본 것도.
아무 의미도 없었다.
"왜 멈췄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새벽이 나무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뭐가."
"새."
나뭇가지 위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그게 왜."
"예쁘잖아."
나는 잠시 새를 바라봤다. 평범한 새였다. 특별할 것 없는.
"가자."
"응."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것이 조금 덜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