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금조Lv.99
- 작성일 2026.10.01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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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 년이 지났다. 인간에게 십오 년은 긴 시간일 것이다. 흔히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아이 하나가 자라 어른이 되고, 익숙했던 거리가 낯설어지고, 어떤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기에도 충분한 시간. 엘프에게 십오 년은 조금 다르다. 아주 길다고 하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기기에는 분명 긴 시간이다. 나무 한 그루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고, 숲의 길 역시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았다. 삼 년마다 공존의 축제가 돌아왔고, 그때마다 나는 같은 숲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기대했고, 그다음에는 기다렸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척했다. 그래도 가지 않은 적은 없었다. 아마 시간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흐르면서도, 남기는 흔적은 조금씩 다른 모양이다. 그리고 그리움은 수명과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첫 번째 공존의 축제가 돌아왔을 때는 꽤 일찍 숲으로 갔다. 정말 다시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다. 고목 아래에 앉아 태양과 달이 겹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래 기다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웃으면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이 있으니까. 황혼은 약속을 잊을 사람이 아니다. 세계의 경계가 열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 무렵까지는 아직 동료들과 함께였다. 오랜 싸움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해야 할 일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무너진 곳을 바로잡고, 남아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각자가 돌아갈 자리를 만드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긴 여정이 끝나자 우리는 하나둘 각자의 길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고향으로, 누군가는 지켜야 할 곳으로, 누군가는 새로운 목표를 찾아 떠났다. 나 역시 내 자리로 돌아갔다. 헤어진다고 해서 인연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자주 만났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식을 주고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만나는 간격은 조금씩 길어졌지만, 그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육 년째 되는 공존의 축제날에도 나는 같은 숲으로 갔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첫 번째처럼 들뜨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목 앞에 서는 순간 마음 한쪽이 괜히 빨라졌다. 혹시. 정말 혹시. 나는 다시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도 아무 일도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처음으로 생각했다. 다시는 못 만나는 걸까.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오래 두지 않았다. 황혼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다른 세계에 있다는 건 애초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아홉 해째에도 나는 같은 곳으로 갔다. 그 무렵에는 공존의 축제가 가까워지면 몇몇 동료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기도 했다. 이번에도 갈 거냐고. 나는 언제나 같은 대답을 했다. 간다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기다리느냐고 물었고, 나는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아마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삼 년마다 돌아오는 그날만큼은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러 간다는 것을. 열두 해째에는 기대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고목에 손을 얹고 한참 서 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숲을 바라봤다. "잘 지내고 있으면 됐지." 혼잣말이었다. 그날은 해가 완전히 기울기 전에 돌아왔다.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는 것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도. 그래서 십오 년째 되는 오늘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공존의 축제는 조금 특별했다. 오랜만에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번 축제만큼은 예전처럼 다 같이 보내보자는 말이 나왔고, 이상할 정도로 일정이 잘 맞았다. 아주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자 십오 년이라는 시간이 우습게 느껴졌다. 달라진 이야기를 잔뜩 꺼내놓으면서도 몇 마디 지나지 않아 예전처럼 웃고 있었다. 공존의 축제는 아침부터 마을을 들뜨게 만들었다. 길가에는 장식이 걸렸고 사람들이 음식을 나눴다. 정령들도 평소보다 가까이 내려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나도 동료들 사이에 섞여 웃고 이야기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듣고, 오래 비어 있던 시간을 메우듯 한참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과 달이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삼 년마다 반복해서 본 하늘.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마 내 시선이 너무 오래 하늘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또 그곳에 가는 건가?"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돌아봤다. 동료 몇 명이 나를 보고 있었다. 놀란 사람은 없었다. 나는 작게 웃었다. "응." "이번에는 좀 늦었군." "그러게." 예전 같았으면 해가 뜨자마자 숲으로 향했을 것이다.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결국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한 동료가 물었다. "돌아오긴 할 건가?" 나는 잠시 생각했다. "모르겠어." 누군가 웃었다. "십오 년이 지나도 그건 똑같군." "뭐가?" "그날만 되면 다른 건 안 보이는 거."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런가." 굳이 더 반박하지 않았다. 동료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몇 걸음을 옮기다가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레나." 나는 돌아봤다. "왜?" 잠깐의 침묵 뒤에 동료가 웃었다. "이번에는 만나면 좋겠군."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몇 번이나 아무것도 만나지 못한 채 돌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와서 그만두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나는 웃었다. "나도." 이번에는 정말 그것뿐이었다. 나는 다시 숲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누구도 따라오지 않았다. 이 길만큼은 내가 혼자 가야 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숲 안으로 들어가자 축제의 소음이 빠르게 멀어졌다. 익숙한 길이었다. 몇 번이고 걸었다. 작은 냇물을 지나고, 뿌리가 드러난 나무를 돌아, 오래된 바위 옆을 지나면 보이는 장소. 십오 년 전. 내가 이 세계로 돌아왔던 곳. 빛이 열렸고, 황혼과 헤어졌고, 마지막으로 약속했던 장소. 고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조금 더 굵어졌고, 떨어져 나간 껍질과 새로 자란 가지가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같은 나무였다. 나는 고목 앞에 멈춰 손을 올렸다. "왔어."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이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익숙했다. 나는 조금 웃었다. "이번에도." 말하다가 멈췄다. 이번에도 아무 일도 없겠지. 굳이 끝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고목 아래에 앉았다. 태양과 달이 완전히 겹칠 때까지만 기다리자. 그다음에는 돌아가자. 오랜만에 모두 모인 날이었다. 내가 너무 늦으면 누군가는 분명 음식이 다 식었다고 투덜거릴 것이다. 이미 네 번이나 같은 일을 겪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그게 당연하다. 나는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하늘을 봤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정령 몇 마리가 가까이 왔다가 사라졌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 이상하게 이번에는 실망도 크지 않았다. 아마 기대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니면 너무 오래 기다려서. 기대와 체념의 경계가 조금 흐려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목에 등을 기댔다. "기다리는 건 자신 있다고 했는데." 입 밖으로 내고 나니 웃음이 났다. 십오 년 전에는 장난이었다. 황혼 다음에는 밤이라고 하니까, 그럼 새벽이 오려면 기다려야 하냐고 물었다. 기다리는 건 자신 있다고. 그때는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될 줄 몰랐다. "밤치고는 꽤 길네." 나는 혼자 웃었다. 그래도 엘프에게 십오 년 정도면. 잠깐 생각했다. "……아니." 이번에는 솔직히 인정했다. "많이 길었나." 웃음이 조금 작아졌다. 엘프에게 십오 년이 인간과 같은 무게를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리움까지 가벼워지는 건 아니었다. 얼마나 더 앉아 있었을까. 마을 쪽에서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돌아가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마지막으로 고목을 바라봤다. 다음은 또 삼 년 뒤다. 열여덟 해. 그때도 내가 여기 올까. 아마 올 것이다. 그 생각이 조금 우스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바람이 멈췄다. 정말 갑자기. 조금 전까지 흔들리던 나뭇잎이 동시에 멈췄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주변에 있던 정령들이 한 방향을 바라봤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설마. 아니. 기대하면 안 된다. 몇 번이나 아무 일도 없었다. 이번도 아닐 수 있다. 그런데 몸은 이미 돌아서 있었다. 공기가 흔들렸다. 나무 사이.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아주 조금 일그러졌다.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빛이 나타났다. 희미하게. 처음에는 햇빛이 잘못 비친 줄 알았다. 눈을 깜빡였다.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선명해졌다. 십오 년 전. 내가 이 세계로 돌아오기 직전 봤던 빛. 손끝이 떨렸다.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아직 모른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황혼이라는 보장은 없다. 우연히 열린 다른 공간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가슴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뛰고 있었다. 빛이 커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긴 머리. 익숙한 귀. 익숙한 얼굴. 나는 그대로 굳었다. 황혼도 나를 발견했다. 그쪽도 멈췄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이상했다. 십오 년 동안 수없이 상상했다. 다시 만나면 뭐라고 할지. 늦었다고 놀릴지. 정말 왔냐고 물을지. 왜 이제야 왔느냐고 할지.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냐고 할지.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보니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정말로 내 앞에 황혼이.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진짜 왔네." 황혼이 숨을 한번 내쉬었다. "약속했잖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 이 목소리였다. 어느 순간 조금 흐려졌다고 생각했던. 그 목소리. 나는 결국 웃었다. "그렇긴 한데." 황혼을 바라봤다. 정말 황혼이었다. 십오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엘프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세히 보면 조금 달랐다. 표정이 전보다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이제 내가 황혼의 표정을 더 잘 읽을 수 있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반쯤은 안 올 줄 알았어." 황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다시 같은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그건 나도 몰랐어." "그래도 왔네." "그래." 짧은 대답.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왔다. 정말로. 황혼이 약속을 지켰다.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십오 년이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짧아진 기분이었다. 황혼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먼저 묻기도 전에 말했다. "잘 지냈어?" 나는 조금 놀랐다. 정말 사소한 말이었다. 십오 년 만에 만난 사람에게 하는 첫 질문치고는 너무 평범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따뜻해졌다. 나는 웃었다. "응." 그리고 물었다. "황혼은?" "나도." 그게 전부였다. 십오 년이나 지나서 다시 만났는데. 잘 지냈냐고 묻고. 잘 지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걸로 충분했다. 황혼이 손을 내밀었다. "이거." "응?" 작은 천으로 싸인 무언가였다. 나는 받아 들었다. "뭔데?" "네 거야." "내 거?" 나는 조심스럽게 천을 펼쳤다. 안에는 작은 꽃 하나가 들어 있었다. 바싹 말라 있었다. 색은 오래전에 바랬고,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질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런데 형태는 남아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꽃?" "그 아이가 줬어." "아이?" "예전에 너한테 꽃 줬던." 잠깐. 나는 꽃을 다시 봤다. 그리고 기억났다. 작은 아이. 나를 꽃 언니라고 불렀던 내가 황혼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아이. "설마." 나는 황혼을 봤다. "이걸 십오 년 동안 가지고 있었어?" 황혼은 조금도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말렸어." 나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건 보이는데." "안 그러면 썩잖아." 정말. 너무 황혼답다. 나는 웃어야 할지 조금 울어야 할지 잠깐 알 수 없었다. 결국 웃었다. "왜." 황혼이 물었다. "아무것도." "그 표정은 뭔데." "그냥." 나는 꽃을 손바닥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올렸다. 십오 년. 황혼은 이걸 십오 년 동안 가지고 있었다. 꽃이 썩지 않게 말리고, 형태가 무너지지 않게 보관하고, 그리고 오늘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져왔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삼년째에도. 육년째에도. 아홉해째에도. 열두해째에도. 혹시 황혼 역시 이 꽃을 들고 어딘가에서 기다렸을까. "황혼." "왜." "혹시." 나는 꽃을 내려다봤다. "이걸 매번 가져왔어?" 황혼이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짧은 침묵만으로도 답을 알 수 있었다. "……가끔." 나는 웃었다. 정말 거짓말을 못 한다. "가끔?" "매번은 아니야." "그래?" "……거의."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황혼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웃어." "그냥." "또 그 말이군." "좋잖아." 나는 꽃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시 천 안에 감쌌다. "고마워." "나는 전달만 한 거야." "십오 년 동안?" 황혼은 입을 다물었고, 나는 더 웃었다. "그래도 고마워." 이번에는 황혼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꽃을 품 안쪽에 넣었다. 이번에는 내가 보관할 차례였다. 잠시 조용해졌다. 이런 침묵도 오랜만이었다. 이상하게 그립던 침묵. 나는 고목을 올려다봤다. "황혼." "왜." "사실 오늘도 안 올 줄 알았어." 황혼이 나를 봤다. "오늘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 년마다 여기 왔어." 황혼의 표정이 아주 조금 변했다. "계속?" "응." "……왜." 나는 웃었다. "기다린다고 했잖아." 황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손으로 고목의 껍질을 가볍게 쓸었다. "처음에는 꽤 기대했어. 삼 년 뒤면 다시 열릴지도 모른다고." 황혼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어. 육 년째에도 왔고. 아홉 해째에도. 열두 해째에도." "……." "열두 해째에는 솔직히 거의 포기했어." 황혼이 아주 작게 말했다. "미안."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왜 황혼이 미안해." "기다리게 했으니까." "황혼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괜찮아."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했다. "기다리는 건 자신 있으니까." 황혼이 멈췄다. 나도 웃었다. "기억나?" "당연하지." "황혼 다음에는 밤이라고 했던 것도?" "네가 이상한 소리를 했으니까."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황혼 다음에는 지금도 밤이야." 나는 웃었다. "그건 맞네." 십오 년 전의 대화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바로 어제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시 고목 아래에 앉았다. "황혼." "왜." "이번에는 얼마나 있을 수 있을까?" 황혼이 뒤를 돌아봤다. 세계 사이에 열린 빛은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가장자리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모르겠어." "그렇구나." 나도 빛을 봤다. 한 시간일 수도 있고. 몇 분일 수도 있다. 어쩌면 생각보다 오래 유지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말했다. "그럼 닫힐 때까지 있자." 황혼이 나를 봤다. "여기서?" "응." "오랜만에 다들 모였다며." "조금쯤은 기다리라고 하지 뭐." "……." 나는 웃었다. "나도 십오 년 기다렸는데." 황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내 옆에 앉았다. 이번에는 두 걸음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옆. 나는 그걸 알아차렸다. 십오 년이 지나도 이런 건 바로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말하면 황혼이 귀찮다는 얼굴을 할 것 같아서.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고목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를 의심했다. 이름도 숨겼다.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다. 나는 황혼에게 다가가려고 했고. 황혼은 두 걸음씩 멀어졌다. 지금은 다 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왜 여기 왔는지. 그리고 십오 년 동안 무엇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그래서인지 말이 없어도 괜찮았다. 나는 품 안에 넣어둔 꽃을 다시 꺼냈다. 아이가 건넸을 때는 살아 있던 꽃이었다. 지금은 색도 바랬고 향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없어지지는 않았다. 문득 웃음이 났다. 황혼이 나를 봤다. "왜." "그냥." "또." "좋잖아." "뭐가." 나는 꽃을 들어 보였다. "이거." "말라버렸는데." "그래도 남아 있잖아." 황혼은 꽃을 잠시 바라봤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이 변한다. 사람도. 장소도. 기억도. 긴 여정을 함께했던 동료들도 이제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늘 옆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오랜만이라는 말을 해야 만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렇다고 함께했던 시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황혼도 마찬가지였다. 기억 속 목소리가 조금 흐려진 날도 있었고, 표정 하나를 정확히 떠올리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데 다시 만나자 바로 알아봤다. 목소리도. 표정도. 걷는 방식도. 그리고 그 사람이 여전히 황혼이라는 것도. 그걸로 충분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정말 궁금해졌다. 나는 황혼을 바라봤다. "황혼." "왜." "정말 잘 지냈어?" 황혼이 나를 봤다. 처음 물었을 때보다 조금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짧은 대답. 나는 웃었다. "다행이다." 황혼이 물었다. "너는?" 나도 잠시 생각했다. 십오 년. 긴 여정이 끝났고, 각자의 길로 헤어졌고, 나는 내 자리에서 새로운 날들을 살았다. 좋은 일도 있었다. 힘든 일도 있었다. 옛 동료들과 다시 만나기도 했고, 오래 소식만 듣던 사람과 반갑게 재회하기도 했다. 그리고 삼 년마다 이곳에 왔다. 나는 대답했다. "나도 잘 지냈어." "그래." 또 침묵. 십오 년 동안 다시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을 많이 생각했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정말 기억하고 있었냐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물어봐야겠다고. 말할 것은 많았다.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황혼을 바라봤다. "오랜만이야, 황혼." 황혼이 나를 봤다. 아주 잠깐. 입가가 조금 움직였다. 그리고 말했다. "……오랜만이야,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