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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팬픽 소설 [루 - 이블리스(디앙겔리온)편] 1
금조
Lv.99
  • 작성일 2026.03.28 12:29
  • 조회수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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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이는 보라색 마기가 내 발목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적신다. 아하하, 이 감각, 이 비릿한 공포의 냄새! 나는 발끝에 채이는 마족의 머리칼을 짓밟으며 고개를 젖혔다. 눈앞의 풍경은 그야말로 지상낙원이다. 찢겨 나간 사지, 흩뿌려진 암흑의 혈흔, 그리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스러지는 벌레들의 군상.


"전부 파괴하는 것이다, 전부!! 더 크게 울부짖어 보거라, 나의 장난감들아!"


나의 외침에 대답하듯, 등 뒤에서 서늘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감정이 소거된, 오직 나의 파괴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나의 꼭두각시. 시엘, 아니 아눌라르가 무심한 눈빛으로 라이플을 고쳐 쥐었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도망치던 마족들의 등에 구멍이 뚫리고 석화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청소 완료."


시엘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인간의 온기 따위는 진즉에 마기에 녹아 없어진 지 오래다. 나는 그 무미건조함이 마음에 들어 그의 뺨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에 묻은 검은 피가 그의 얼굴에 기괴한 무늬를 그렸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아직 부족하구나. 이 심연의 깊이만큼이나 더 깊은 절망이 필요해! 하하하!"


내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허공을 찢으려던 찰나였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분 나쁜 정적. 방금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공포의 소음들이 일순간 진공 상태에 빠진 듯 먹먹해졌다.


"짐의 영토에서 이 무슨 천박한 소란이냐."


머리 위, 거대한 절벽 끝에서 내려다보는 그림자. 보라색 안광을 번뜩이며 서 있는 저 오만한 자태는 분명 나였다.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 세련되게 다듬어진 마신의 뿔, 그리고 그 옆에 선 사내. 시엘과 닮았으나, 그 눈에는 나를 보좌하는 아눌라르에게는 없는 '의지'와 '오만'이 가득 차 있었다.


카타스트로피. 또 다른 세계의 우리.


"새로운 마왕의 탄생이라더니, 고작 미쳐버린 짐승이었던 모양이구나. 자아, 시엘. 저 천박한 것들에게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자구나."


티모리아라 자칭하는 여자가 비웃음을 섞어 명령하자, 곁에 있던 어비셔가 비수를 가볍게 돌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루. 후후, 모조리 숨통을 끊어주지."


나는 끓어오르는 살의에 몸을 떨었다. 저 우아한 척하는 낯짝을 짖이기면 어떤 색의 피가 나올까? 아하하, 드디어 찾았다. 좀 더 튼튼하고, 좀 더 비명소리가 고울 것 같은 최고의 장난감을!


"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너희도 부셔주마! 너희의 그 오만함까지 모조리 씹어 삼켜주겠다!"


나는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손톱 끝에서 돋아난 가시들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며 대기를 짖이기기 시작했다.


절벽 위에서 쏟아지는 푸른 불꽃이 대지를 짓눌렀다. 티모리아라 불린 나의 또 다른 자아는 우아하게 손을 뻗어 허공을 휘저었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심연의 사슬이 얽히고설키며 거대한 그림자를 빚어냈다.


"공포를 깨달을 시간이다. 아폴리온!"


티모리아의 선언과 동시에 차원의 틈새에서 거대한 마수의 팔이 솟구쳤다. 묵직한 중압감이 전신을 결박하듯 옥죄어 왔다. 내 발밑의 지면이 비명을 지르며 내려앉았고, 이윽고 마수의 주먹이 굉음과 함께 나를 덮쳤다.


콰아앙—!


먼지구름이 채 걷히기도 전에 나는 비틀린 웃음을 흘리며 도약했다. 온몸의 근육이 팽창하고 마기가 살을 찢으며 돋아났다. 아픔? 아니, 이건 극상의 쾌락이다! 나는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지면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했다. 주먹 끝에 응집된 마기가 시퍼런 불꽃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가시처럼 곤두섰다.


랜드 크래셔.


지면에 닿는 찰나, 억눌려 있던 심연의 에너지가 파동이 되어 터져 나갔다. 지각을 종잇장처럼 찢으며 솟구친 푸른 마기가 티모리아가 불러낸 마수의 잔상을 갈갈이 찢어발겼다. 산산조각 나는 마력의 파편들을 보며 나는 희열에 젖어 침을 내뱉었다.


"하하하! 좀 더, 좀 더! 강한 녀석은 없는 게냐? 고작 이 정도로 짐을 막겠다고?"


광기 어린 내 외침에 응답한 것은 티모리아가 아니었다. 내 등 뒤, 그림자보다 더 짙은 어둠 속에서 서늘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어비셔가 어느새 거리를 좁히며 대기를 가르는 비수를 투척했다.


"좋아 루, 서포터를 부탁한다!"


어비셔는 헛웃음을 치며 투척한 비수의 궤적을 따라 신속하게 파고들었다. 비수가 내 가시 돋친 어깨를 스치는 찰나, 그는 이미 사정거리 안으로 난입해 있었다.


팬텀 블레이드.


푸른 잔상을 남기며 그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내 가슴팍과 옆구리를 긁고 지나갔가. 그의 움직임은 아눌라르보다 훨씬 유연하고 날카로웠다. 목표를 향한 망설임이 사라진, 완벽한 포식자의 몸짓. 나는 손톱을 세워 그의 후속타를 막아세웠다. 금속과 마기가 부딪히며 불꽃이 튀는 찰나, 저 멀리 외곽에서 대기를 가르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퍼엉—!


아눌라르의 저격이다.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날아온 탄환이 어비셔의 관자놀이를 노리고 쇄도했다. 하지만 탄환이 닿기 직전, 티모리아가 차갑게 웃으며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녀의 손끝에서 번뜩인 마력장갑이 마치 투명한 벽처럼 궤적을 그리며 탄환을 가볍게 튕겨냈다.


"우으... 시엘!! 감히 짐에게 이런 뒤처리나 시키다니!"


티모리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꿍시렁거렸다. 방금 전의 위엄 있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어비셔의 뒤를 받쳤다. 하지만 그 가벼운 불평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눈빛은 단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고 아눌라르의 위치를 훑고 있었다.


"아하하! 재미있구나, 정말 재미있어! 시엘, 저 건방진 녀석의 목을 따오너라! 짐은 저 계집의 뿔을 꺾어 침실의 장식품으로 삼아주마!"


내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아눌라르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감정이 거세된 그의 눈동자에 오직 '사살'이라는 목표만이 각인되었다. 그는 내 등 뒤에서 지면을 박차고 나갔다.


데스페라도.


아눌라르가 서서 자세를 잡았다. 그를 중심으로 푸른 마기의 파동이 지면을 타고 부채꼴로 뻗어 나가며 어비셔의 발치를 덮쳤다. 순식간에 솟구친 마기의 울타리들이 어비셔의 사지를 옭아매며 그를 제자리에 강박했다. 그 찰나의 정적 속에서, 아눌라르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총신을 고정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 끝에서 응집된 파괴적인 마력이 직선의 궤적을 그리며 쇄도했다.


쿠우웅—!


탄환이 어비셔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 지면을 뚫고 거대한 마수의 팔들이 솟구쳐 올랐다.


데드 크로스.


티모리아가 허공에 그린 보라색 소환진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지면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심연의 사슬에 묶인 채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마수의 팔들이 거세게 휘둘러지며, 어비셔를 옥죄고 있던 마기의 사슬들을 단숨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동시에 마수의 팔은 어비셔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방패가 되었고, 쇄도하던 저격 탄환은 그 단단한 외피에 부딪혀 비명 같은 파열음과 함께 튕겨 나갔다.


어비셔가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진 몸으로 티모리아의 곁으로 물러났다. 티모리아는 오만한 눈빛으로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며 낮게 읊조렸다. 지면에서 솟아난 마수의 팔들은 멈추지 않고 두 사람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주변의 모든 것을 휘둘러 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물리적 타격에 아눌라르의 후속 저격 궤도가 완전히 뒤틀렸고, 단단했던 지면은 종잇장처럼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전방위로 퍼져 나가는 충격파의 한복판에서 나는 오히려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면의 마기가 임계점을 넘어 폭주하고 있었다.


"아하하하!! 그래, 이거다! 이 파열음! 이 파괴의 향기!! 시엘, 그 자리에서 엄호해라! 저 가짜 마왕들을 심연의 밑바닥까지 처박아주마!"


나는 내 등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아눌라르의 존재감을 느끼며 어비셔를 향해 쇄도했다. 아눌라르의 살의가 내 마기와 공명하며, 우리 주변의 대기가 검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알터 오브 이블.


내 육체를 잠식한 마기가 비명을 지르며 팽창했다. 살점이 터져 나가는 고통은 이내 극상의 희열로 변질되었고, 그 틈을 뚫고 칠흑처럼 어두운 청람색의 마력이 폭사했다. 머리 위로는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마신의 뿔이 돋아났고, 등 뒤에서는 보라색 화염을 머금은 마력의 날개가 거대한 파동을 그리며 펼쳐졌다.


손등과 어깨를 타고 흐르는 기괴한 문양들이 푸른 안광을 내뿜으며 전신의 근육을 뒤틀었다. 마력으로 응집된 날카로운 발톱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결을 찢어발겼고, 내딛는 발걸음마다 지면은 검게 타들어 갔다.


"짐이 곧 심연이며, 파괴 그 자체이니라! 감히 누가 마왕을 자처하는 것이냐!"


나의 포효와 함께 폭주하는 마기가 폭풍이 되어 티모리아와 어비셔를 덮쳤다. 하지만 그들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티모리아는 비웃듯 손가락을 튕겼고, 그녀의 배후에서 거대한 마신 앙그라마이뉴의 형상이 실체화되며 압도적인 중력으로 나를 눌러왔다.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다. 파이널 카타스트로피!"


티모리아의 선언과 동시에 어비셔가 청색의 궤적을 그리며 쇄도했다. 그가 휘두르는 비수의 끝이 내 가슴팍을 가르기 직전, 저격 위치에서 엄호하던 아눌라르가 라이플을 내던지며 지면을 박차고 난입했다.


다키스트 디앙겔리온.


그림자보다 빠른 속도로 내 앞을 가로막은 아눌라르가 어비셔의 팔을 잡아채 궤도를 틀어버렸다. 어비셔의 비수가 내 뺨을 스치며 지나갔고, 아눌라르는 그 반동을 이용해 티모리아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어 그녀의 보라색 외투를 거세게 낚아챘다. 억지로 한데 묶인 두 녀석들이 비틀거리는 찰나,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든 마기를 폭발시켰다.


"아하하하!! 짐과 함께 멸하여라! 모조리 삼켜주마!"


나의 포효와 함께 상공에서 마신의 거대한 주먹이 떨어져 내렸고, 나는 지면에서 솟구치는 칠흑의 마기 기둥으로 그 주먹을 맞받아쳤다.


쿠우웅—!


두 힘이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지점에서 대기가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가. 마신의 주먹에 눌린 내 팔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오히려 그 고통을 비웃으며 마기를 더 거세게 뿜어냈다. 티모리아가 한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움켜쥐려 했고, 나는 그녀의 손목을 물어뜯을 듯이 달려들며 가시를 뿜어냈다. 살점이 타는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공포의 마력이 내 안면을 태웠지만, 나는 그 열기를 비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손톱으로 가르려 했다.


"알고 있어 루. 이 지루한 유희도 이제 슬슬 막을 내릴 때군."


어비셔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임계점에 도달한 마력이 주변 공간을 집어삼키며 하얗게 점멸하던 세상을 다시금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혔다. 으스러진 지각의 파편들이 폭풍에 휘말려 대기를 찢는 파멸의 중심에서, 우리는 서로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며 마지막 한 방울의 마기까지 쥐어짜 내는 처절한 대치를 이어갔다.


"하아, 하아... 아하하! 봐라! 너의 그 오만한 안광이 흐려지는 꼴을! 짐이 너를 완전히 집어삼켜 주마!"


내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의 가시들이 티모리아를 둘러싼 보라색 마력막을 찢어가며 그녀의 코앞까지 쇄도했다. 그녀 역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심연의 사슬을 휘감아 내 팔을 옭아매었고, 금방이라도 내 뼈를 으스러뜨릴 듯이 잡아당겼다.


"천박한 짐승이... 감히 짐을 굴복시키려 들다니...!"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분노와 살의로 번뜩였다. 그 곁에서 어비셔와 아눌라르 또한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사투를 이어갔다. 어비셔의 푸른 비수가 아눌라르의 라이플 총신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고, 아눌라르는 영거리에서 마력 탄환을 쏘아 올리며 어비셔의 접근을 차단했다. 네 명의 영혼이 내뿜는 마력이 한데 엉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파국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내 안의 뜨겁게 끓어오르던 무언가가 일순간에 식어 내렸다.


지금껏 나를 지탱해온 끝없는 굶주림이, 티모리아라는 '완벽한 나'를 마주한 순간 기묘한 포만감으로 변질되었다. 이 자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들, 과연 지금 이 순간 느꼈던 전율보다 더한 희열이 남아있을까?


적의 심장을 도려내고 왕좌에 앉는 상상보다, 지금 이 부서질 듯한 긴장감 자체가 나를 더 완벽하게 완성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투쟁은 사족일 뿐이었다. 나는 티모리아의 방어막을 뚫고 그녀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 뻗었던 손에서 힘을 빼며 허공에 멈춰 섰다.


휘몰아치던 검은 마기가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지면을 찢던 진동이 잦아들고, 고요가 파열음의 자리를 꿰찼다. 나는 타버린 옷자락을 무심하게 털어내며, 거친 호흡을 억지로 억누른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만두마. 흥이 깨졌다."


나의 목소리는 광기를 완전히 걷어내고 기이할 정도로 차분해져 있었다.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전장을 메우던 살기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나의 의지를 즉각적으로 읽어낸 아눌라르 또한 어비셔와 맞부딪히던 라이플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그는 흐트러진 호흡을 정돈하며 묵묵히 내 등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우리는 무너져 내리는 심연의 차원 틈새로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공포의 마왕이라더니, 한낱 어린아이의 놀이에 불과했구나. 미물을 잡으러 다니는 취미는 짐에게 없다."


나는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채, 경악으로 일렁이는 티모리아의 눈동자를 느긋하게 감상했다. 손등에 흐르는 피를 혀끝으로 천천히 훑어 내는 나의 눈빛에는, 갈구하던 정답을 확인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잔인한 만족감과 조롱이 뒤섞여 있었다.


"잠깐... 어디를 가는 것이냐! 이 무례한 것! 아직 짐의 사슬이 너의 목을 감지 않았단 말이다!"


뒤편에서 터져 나오는 티모리아의 날 선 비명이 부서진 대기를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의 뒤돌아봄도 없이, 암전되어 가는 세계의 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뀨우우우!! 짜증 나! 짜증 나는구나! 이 무례하고 천박한 것! 감히 짐을 이 꼴로 두고 어딜 가느냐!"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곁에서 만신창이가 된 어비셔가 가벼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눌라르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크... 이쪽 나도 고생이 많겠군..." 이라며 자신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티모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후후, 이거 정말... 모양 빠지는 마무리구만."


어비셔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여전히 씩씩거리는 티모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이미 무너져 내리는 차원의 경계는 그들의 퇴장을 강요하고 있었다. 심연의 해일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며 그녀와 어비셔를 반대편 어둠 속으로 거세게 밀어냈다.


"두고 봐라! 반드시... 반드시 다시 찾아내서 네놈의 그 여유로운 낯짝을 뭉개주마! 이블리스!! 으아앙, 짜증 나아아!"


멀어지는 어둠 속에서 티모리아의 비명 같은 투정이 메아리쳤다. 어비셔는 난감하다는 듯 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억지로 티모리아를 끌어안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홀로 남은 심연의 공간에서 아눌라르의 어깨에 기대어 앉았다.


"하하. 정말 시끄러운 여자로구나. 하지만 뭐, 죽여버리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나는 울컥 배어 나오는 핏물을 바닥에 뱉어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광기 어린 유희가 남기고 간 잔열이 온몸의 감각을 자극했지만, 역설적으로 마음만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아눌라르는 대답 대신 묵묵히 내 곁을 지키며, 무너지기 직전인 나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내 주었다.


저 멀리 허공 어딘가에서 "짜증 나!"라고 외치던 그녀의 잔향이 환청처럼 맴돌았다. 평생을 괴롭히던 그 지독한 굶주림이, 그 유치하고 소란스러운 외침 덕분에 아주 기분 좋은 포만감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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