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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팬픽 소설 [노아 - 리버레이터편]
금조
Lv.99
  • 작성일 2026.03.24 22:42
  • 조회수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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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밑을 적시는 것은 지독하게 차가운 물일까, 아니면 녹아내린 기억의 잔해일까.


하르니에와 다크문의 인도를 받아 발을 들인 무의식의 심연은 기묘할 정도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내 피부를 훑으며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했다. 이곳은 내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혹은 필사적으로 되찾고 싶었던 진실이 매몰된 무덤이다.


"......형."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온 이름은 허공에 흩어지지 못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문스톤의 냉기가 평소보다 차분하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이 차가움에 몸을 떨며 복수만을 떠올렸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림자는 이제 나를 집어삼키는 저주가 아니라, 내가 다스려야 할 나의 일부니까.


그때였다. 일렁이는 어둠 너머로 낯선, 그러면서도 지독하게 익숙한 마력이 파동을 일으켰다.


"이곳의 성좌들은 유난히 슬픈 빛을 내고 있네. 마치 누군가의 눈물로 빚어낸 것처럼 말이야."


느긋하면서도 다정한, 하지만 어딘가 장난스러운 활기가 섞인 목소리.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곳을 응시했다. 그림자가 내 발치에서 잔잔하게 일렁이며 주변을 탐색했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것은 나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나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훨씬 더 큰 키에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는 은하수 같은 잔상이 남았고, 곁에는 은은한 빛을 내뿜는 정령이—클라모르가—부유하고 있었다.


"어이, 노아! 저기 있는 친구 표정이 너무 무섭잖아. 좀 살살 다가가라고."


"에이, 형도 참. 이게 내 매력이라니까?"


그는 곁의 정령과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의 눈은 밤하늘의 모든 별을 담은 듯 신비롭게 빛났고, 그 안에는 깊은 수수께끼를 즐기는 듯한 즐거움이 서려 있었다.


"......넌 누구야? 이곳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리 없을 텐데."


내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이 서 있지는 않았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호기심과 동질감이 섞인, 마치 재미있는 운명의 장난을 목격한 듯한 시선이었다.


"글쎄, 네가 경험하지 못한 미래의 조각이라고 해두면 어떨까? 아니면, 네가 선택하지 않은 시간의 결과물이라든가."


그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복잡한 별자리의 궤도가 그려지더니, 차가운 심연의 공기를 부드러운 마력으로 치환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이 비극적인 무의식조차 하나의 관측 대상인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미래라...... 그런 거창한 건 생각해 본 적 없어. 난 그저 내 의지로 이 어둠을 걷어내고 싶을 뿐이야. 더는 누군가의 의도대로 휘둘리고 싶지 않으니까."


"의지가 강하네, 리버레이터. 조금 더 유연하게 굴어보는 건 어때? 미래라는 건 생각보다 꽤 근사하거든."


그가 내 말을 가볍게 받아치며 씩 웃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와, 그 모든 것을 경험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담겨 있었다. 셀레스티아라 불린 또 다른 나는 한 걸음 더 다가와 내 낫의 서늘한 날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너는 네 의지로 어둠을 다스리기로 했지. 정말 너다운 선택이야. 하지만 나는 저 우주의 끝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 우리가 쌓아온 이 시간들이 결국 어디로 흐르게 될지 말이야. 그게 실패라면...... 뭐, 어쩔 수 없는 실수였다고 치지 뭐!"


"실수라고? 그 말, 진심이야?"


내가 조금 어이없다는 듯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응, 진심이야. 내 선택의 결과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거든. 그런데 말이야......"


그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조금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리가 마주할 진실이 생각보다 더 '그립고도 증오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방금 내 운명 카드가 그렇게 말해줬거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를 둘러싼 무의식의 영역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늘색의 신성한 오라와 파란색의 짙은 어둠이 바닥에서 솟구치며 영역을 나누었다. 대기는 비명을 지르듯 뒤틀렸고, 저 멀리서 불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팡이 두 개가 거대한 쐐기처럼 지면에 박혔다. 그리고 그 사이로,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러나 지금은 무언가에 잠식되어버린 형의 형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신들의 가능성, 보여주시겠어요?"


단탈리온의 뒤틀린 목소리가 심연을 울렸다. 나는 리버레이터로서 발밑의 그림자를 짙게 끌어올렸고, 내 곁의 셀레스티아는 카드를 한 번 훑더니 은하의 성좌를 펼쳐 보였다.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두 개의 의지가, 마침내 하나의 진실 앞에 나란히 섰다.


심연의 고요를 깨뜨린 것은 거대한 파열음이었다.


단탈리온의 목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바닥에 박힌 두 자루의 지팡이로부터 파동이 몰아쳤다. 하늘색과 파란색, 상반된 두 빛깔이 원형의 경계를 그리며 무의식을 잠식해 들어왔다. 공기 중에는 타는 듯한 마력의 냄새와 소름 끼치는 살의가 섞여 있었다.


"......이게 '영역'이라는 건가? 꽤 압박감이 심하네."


나는 낫을 낮게 쥐며 발밑을 살폈다. 파란색 영역이 내 발끝에 닿자마자, 마치 늪에 빠진 듯 몸이 무거워졌다. 그림자의 힘조차 이 부자연스러운 감속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듯했다.


"와, 이거 봐 형! 내 마력이 조금씩 고양되고 있어. 이 하늘색 자리는 꽤 기분이 좋은걸?"


내 옆에서 셀레스티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는 이미 하늘색 영역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마력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성좌의 파편들이 허공에서 춤을 추듯 일렁였다.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냐. 저길 봐."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영역의 테두리에 기괴한 문양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비켜!"


나는 본능적으로 셀레스티아의 뒷덜미를 낚아채며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찰나의 순간, 우리가 서 있던 영역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단순한 마력의 충돌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찢겨 나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심연의 잔해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우와, 방금 건 좀 위험했는데? 고마워!"


셀레스티아는 공중에서 가볍게 회전하며 착지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의 곁에 있던 클라모르가 질색하며 소리쳤다.


"노아! 제발 긴장 좀 해! 저 녀석은 지금 우리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거라고!"


"알고 있어, 형. 하지만 운명은 이미 우리 편인걸?"


그가 다시 카드를 한 장 뽑아 들었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은하의 궤도가 그려지며 '네이탈 차트'가 펼쳐졌다. 신비로운 별빛이 쏟아지며 내 몸을 감싸던 파란색 디버프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아...... 여전하네, 정말."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개와 늑대의 시간. 낮과 밤이 교차하는 찰나의 경계, 느릿하게 움직이던 세상이 순식간에 정지한 듯 멈춰 섰다.


나는 어둠을 가로질러 단탈리온, 아니 형의 모습을 한 괴물에게 육박했다. 낫의 날이 검은 궤적을 그리며 그의 허상을 베어 갈랐지만, 그것은 마치 연기를 베는 것처럼 허망했다.


"하하하...... 너무 겁먹지 마세요. 도망칠 기회...... 드릴까요?"


괴물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지팡이가 바닥의 포탈 속으로 사라지더니, 대기가 더욱 짙은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셀레스티아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며 빛났다.


"도망칠 기회라니, 사양할게. 난 이미 이 우주에서 가장 멋진 미래를 예약해 뒀거든!"


셀레스티아가 손을 뻗자, 머리 위로 '퀘이사'가 소환되며 영역의 폭발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빛과 어둠, 서로 다른 두 힘이 충돌하며 무의식의 공간을 반으로 갈랐다.


나는 낫을 고쳐 쥐며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적을 응시했다. 의무도, 책임도 아니다. 이것은 나의 의지다. 그리고 내 곁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미래를 웃으며 말하는 또 다른 내가 있다.


"너, 아까 실수 어쩌고 했지? 이번엔 실수하지마."


"걱정 마! 오늘 내 패는 최고니까!"


서로의 등을 맞댄 채 내뱉은 호기로운 선언이 무색하게도, 암전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찰나의 정적 속에서 모든 빛이 소멸했다. 셀레스티아가 방금 전까지 화려하게 펼쳐놓았던 성좌의 잔상조차 거대한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시각을 잃은 공간에서 오직 내 심장 소리만이 고요를 날카롭게 두드렸다. 단순히 어둠이 깔린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듯한 불길한 감각이었다.


"형......?"


어둠 속에서 다시 빛이 돌아왔을 때, 눈앞에 선 존재는 더 이상 내가 알던 형의 잔영이 아니었다.


다정하게 빛나던 눈자리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낙서 같은 문양이 기괴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바닥의 포탈에서는 보석마저 어둡게 변질된 스태프가 튀어나왔고, 그가 책을 촤르륵 펼칠 때마다 무의식의 공간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와...... 이건 좀 너무한데. 형, 저거 디자인이 너무 악취미 아냐?"


옆에서 셀레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평소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였지만, 그 역시 들고 있던 카드 뭉치를 손가락 사이로 꽉 쥐고 있었다. 곁에 뜬 클라모르 또한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조심해, 노아! 마력의 성질이 완전히 바뀌었어. 이건 단순한 어둠이 아냐!"


바닥에 다시 영역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두 개가 아니었다. 하늘색과 파란색 사이로, 독기를 품은 듯한 보라색 영역이 소름 끼치게 번져 나갔다.


"보라색이라...... 느낌이 안 좋은데."


나는 시험 삼아 보라색 영역에 발을 디뎠다. 그 순간, 내 몸을 감싸고 있던 그림자의 힘이 눈에 띄게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근육은 비명을 질렀고, 낫을 쥐는 악력이 힘없이 풀리려 했다. 흑의 오라. 공격하려는 의지조차 갉아먹는 지독한 저주였다.


"그 보라색 안개는 피하는 게 좋겠어. 네 그림자가 겁을 집어먹고 작아지고 있거든. 어서 나와!"


셀레스티아가 여유로운 척하면서도 날카롭게 외치며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서펜타리우스. 은하수가 그의 손끝을 따라 직선으로 뻗어 나가며 보라색 영역을 일시적으로 지워버렸다. 그리고 은하의 길을 따라 별자리 돌고래들이 튀어 오르며 단탈리온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알고 있어. 하지만 영역 폭발 속도가 아까보다 훨씬 빨라!"


테두리에 문양이 새겨지자마자 대지가 진동했다. 생각할 틈도 없이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암흑의 습격. 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사방으로 튀는 파편들을 피해 단탈리온의 배후를 노렸다.


"하하하...... 도망치는 건 여전하시네요. 하지만 이 무대에서 내려갈 순 없답니다."


단탈리온이 책장을 넘기자 보라색 영역이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내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공간 전체가 거대한 함정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무대라고? 관객도 없는 무대는 재미없거든. 자, 이거나 먹어라!"


셀레스티아가 공중으로 도약하며 외쳤다. 그의 머리 위로 수많은 별들이 연결되며 '스타 코스터'가 그려졌고, 빛의 궤적이 단탈리온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가 그림자 너머에서 튀어나와 낫을 크게 휘둘렀다.


"의지가 꺾일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난 이미 지옥을 보고 왔거든."


내 낫 끝에 서린 그림자가 단탈리온의 보라색 오라와 부딪히며 날카로운 불꽃을 튀겼다. 뒤이어 셀레스티아가 허공에 그린 별의 궤적들이 단탈리온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힘의 근원은 달랐지만, 우리는 같은 목적으로 이 심연의 중심을 향해 칼날과 성좌의 마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우리의 공세가 거세질수록 단탈리온의 웃음소리는 오히려 잦아들었다. 광기 어린 폭소 대신, 폐부를 긁는 듯한 낮은 숨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그 기괴한 고요함에 맞춰 바닥의 틈새마다 고여있던 보라색 안개가 마치 굶주린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꿈틀대며 우리를 향해 기어 올라왔다.


단순히 시야를 가리는 안개가 아니었다. 그것이 닿는 곳마다 지면은 순식간에 수만 개의 보랏빛 가시로 돋아나 발등을 찔렀고, 공기는 산소마저 얼려버릴 듯 무겁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소름 끼치는 정적 속에서 공간 자체가 우리를 거부하며 거대한 덫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조심해! 놈의 마력이 임계점을 넘었어!"


클라모르의 외침이 들림과 동시에, 단탈리온의 뒤틀린 육신이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주변의 모든 파편이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며 공간 전체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윽고 그 혼돈의 한복판에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박동이 울려 퍼졌다.


"자... 당신들의 가능성, 보여주시겠어요?"


단탈리온의 목소리가 심연의 바닥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그는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고, 그의 등 뒤로 차가운 은백색 빛을 내뿜는 거대한 달이 떠올랐다. 그 달은 신비로운 보랏빛 문양에 둘러싸인 채 주변의 모든 마력을 응집시키고 있었다.


'차오르는 달빛이 노을처럼 빛나다, 이내 사라질지어다.'


그의 머리 위로 기괴한 세 개의 문양이 차례로 점멸했다. 그와 동시에 이 뒤틀린 공간의 왼쪽, 중앙, 오른쪽 바닥에서 동일한 문양들이 뒤틀린 마력의 형태로 솟구쳐 올랐다. 바닥의 문양들은 단탈리온의 머리 위 문양과 공명하며 소름 끼치는 진동을 일으켰고, 그 진동이 닿는 곳마다 공간이 유리처럼 금 가기 시작했다.


"저거 봐, 저 달이 완전히 차오르면 우린 여기서 영영 못 나갈 것 같은데?"


셀레스티아가 평소의 여유를 조금 거두며 외쳤다. 그의 말대로 은백색 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은 방금 전까지의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공간 전체가 시린 빛에 타들어 가며 소멸의 전조를 보이고 있었다.


'내 그림자가 반응하고 있어... 저 문양들이 달에 마력을 공급하는 축이야.'


나는 낫을 고쳐 쥐며 바닥을 박차고 나갔다. 단탈리온의 머리 위에서 첫 번째로 빛나고 있는 문양과 똑같은 형상이 왼쪽 바닥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문양을 없애야 해. 저놈 머리 위에 뜬 순서대로 쳐서 마력의 흐름을 끊는 수밖에 없어!"


첫 번째 타겟은 왼쪽.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지독한 보라색 안개가 가로막고 있었다.


"왼쪽은 내가 맡을게! 형, 운 좀 빌려줘!"


셀레스티아가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네이탈 차트. '딱' 하는 경쾌한 파찰음과 함께 시계바늘이 운명적인 소리를 내며 12시 방향을 가리켰다. 포춘 오브 언노운. 믿기 힘들 정도의 행운이 우리를 감쌌다. 눈부신 빛과 함께, 쏟아지는 마력이 우리의 모든 감각을 가속했다.


셀레스티아가 빛의 궤적을 그리며 왼쪽의 문양을 퀘이사의 폭발로 지워버렸다.


"다음은 중앙이야!"


나는 가속된 신체를 이용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중앙의 문양 위로는 단탈리온의 검은 마력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순 없었다.


"이건 내 의지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암흑의 습격. 나는 쏟아지는 마력의 비 사이를 돌파했다. 낫의 날이 중앙의 문양을 수직으로 갈랐다. 불쾌한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두 번째 제약이 풀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오른쪽의 마지막 문양 하나. 하지만 단탈리온의 방해는 더욱 거세졌다. 은백색 달이 붉게 충혈되듯 번득이며 공간 전체를 집어삼키려 했다. 시야는 잉크를 쏟아부은 듯 순식간에 암전되었고, 방향 감각마저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차, 또 실수할 뻔했네!"


지독한 어둠 속에서 셀레스티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당황하는 대신 다시 한번 손가락을 툭, 튕겨내며 자신의 주변을 성좌의 빛으로 밝혔다.


"내 별빛이 닿는 곳을 봐! 저기 가장 어둡게 뒤틀린 자리가 보이지? 바로 거기야!"


그의 정교한 관측 덕분에 나는 방향을 잃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힘을 낫에 실어 오른쪽으로 도약했다. 삭월의 그림자. 내 발밑에서 뻗어 나간 그림자가 달의 형상을 그리며 마지막 문양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세상을 압박하던 은백색 달이 비명을 지르며 쪼개지기 시작했다.


"하하하......"


단탈리온의 육신이 무너지며 그 안에서 형의 다정한 얼굴이 아주 잠깐, 슬픈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리는 숨을 헐떡이며 무너져 내리는 심연의 중심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린 은백색으로 차올랐던 달이 비명과 함께 파편화되어 흩날리는 풍경은 기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폭발의 여파가 잦아들자, 우리를 옥죄던 보랏빛 문양들과 압도적인 중압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단탈리온의 기괴한 육신은 더 이상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그 연무가 걷힌 자리, 심연의 가장 깊은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하르케 형."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엔 환영도, 단탈리온이 빚어낸 괴물도 아니었다. 비록 무의식이 만들어낸 잔재일지라도, 그 눈빛만큼은 내가 기억하는 세상에서 가장 상냥했던 형의 것이었다.


"노아, 그리고...... 또 한 명의 노아."


하르케 형은 부드럽게 웃으며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원망이나 고통 따위는 없었다. 오직 홀로 남겨진 동생이 이 험난한 여정을 거쳐 여기까지 도달했다는 것에 대한 대견함만이 서려 있었다.


"형, 나...... 복수만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어.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내 의지로,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나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낫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곁에 서 있던 셀레스티아가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는 평소의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우고, 한층 성숙한 눈빛으로 형을 마주했다.


"나도 그래, 형. 처음엔 모든 게 무섭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제는 궁금해졌거든. 형이 없는 세상이라도,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미래가 얼마나 빛날지."


형은 천천히 다가와 우리 두 사람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 듯한 손짓을 했다. 실체가 없는 온기였지만, 그 어떤 만남보다도 뜨겁게 심장을 울렸다.


"너희는 이미 충분히 잘해왔단다. 복수의 강박도,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부채감도 이제는 내려놓으렴."


형의 형체가 서서히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무의식의 공간이 무너지며 원래의 현실, 하르니에와 다크문이 기다리는 그곳으로의 통로가 열리고 있었다.


"노아, 네가 다시 웃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


하르케 형의 다정한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뇌리를 감싸 안았다. 그 따스함에 가슴 속 깊이 박혀있던 가시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내 의지는 이미 어둠을 걷어냈고, 셀레스티아의 성좌는 그 끝의 미래를 비추고 있으니까.


"잘 가, 형. 아니...... 다시 만나."


우리는 동시에 형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지독하게 차가웠던 무의식의 물이 따스한 빛의 파도로 변해 우리를 감싸 안았다. 굴레에서 해방된 그림자와 성좌의 관측자, 두 소년은 비로소 과거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완전히 걸어 나왔다.


지독하게 차가웠던 물살이 잦아들고, 세상은 온통 하얀 정적에 잠겼다.


여전히 무의식의 심연 어딘가였지만, 더 이상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감은 눈꺼풀 너벌로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었다. 마치 아주 긴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몽롱함 같았다. 손바닥에 남은 문스톤의 잔열과 가슴 속의 홀가분함만이 방금 전의 사투가 단순한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야, 정말로 끝났네."


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말은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묵직한 안도감이 되어 고였다. 복수라는 해묵은 굴레를 벗어던진 자리에는, 오직 내가 선택한 내일만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어이, 거기. 잠꾸러기처럼 너무 오래 자는 거 아냐?"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적응 안 되는 유쾌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나와 같은 얼굴을 한, 하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그가—셀레스티아가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정령화된 클라모르가 은은한 빛을 내며 떠 있었다.


"너...... 아직도 안 돌아갔어?"


"돌아가다니? 성좌의 관측자가 이 흥미로운 우주의 조각을 두고 어디로 가겠어. 안 그래, 형?"


"그래, 그래. 하여간 이 녀석의 호기심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셀레스티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그 손을 바라보다가, 가벼운 헛웃음과 함께 그 손을 맞잡고 일어났다. 우리는 같은 노아였지만, 각자가 품은 빛의 색은 달랐다.


"난 내 의지로 이 땅의 어둠을 걷어낼 거야. 다시는 형이나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나의 단호한 선언에 셀레스티아는 밤하늘의 별을 관측하듯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멋지네. 그럼 난 저 우주의 끝까지 펼쳐진 미래를 지켜볼게. 네가 지켜낸 이 세상이 어떤 별자리를 그려낼지 궁금하거든."


우리는 아직 빛으로 가득한 무의식의 통로를 향해 함께 걸음을 옮겼다. 한때는 증오와 슬픔만이 가득했던 이 여정의 끝에, 이제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희망이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허리춤의 낫을 고쳐 잡았고, 그는 자신의 카드를 가볍게 섞으며 다음 운명을 점쳤다.


"궁금하지 않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에 어떤 근사한 패가 숨겨져 있을지 말이야."


"별로. 내 의지로 직접 만들어낼 테니까."


내 대답에 셀레스티아는 "역시 깐깐하다니까!"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하얀 공간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의지는 그림자가 되어 대지를 지키고, 갇혀 있던 시간 속에서 깨어난 선택은 성좌가 되어 미래를 비춘다.


서서히 의식이 현실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감았던 눈을 뜨면, 그곳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기다려준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를 돌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우리 앞에는 더 이상 과거의 유령이 아닌, 눈부시게 찬란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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