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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팬픽 소설 [아인 - 비고트편]
금조
Lv.99
  • 작성일 2026.03.27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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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부를 찌르는 공기는 차갑다 못해 날카로웠다. 이곳은 생명이 허락되지 않은 땅, 여신의 온기가 닿지 않는 헤니르의 심연이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부서지는 것은 바닥인가, 아니면 나 자신의 이성인가. 마기와 혼돈에 침식된 나의 육신은 역설적으로 이 부정한 기운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보이십니까... 여신이시여. 저는 아직 이곳에 있습니다."


응답은 없다. 언제나처럼 끔찍한 정적뿐이다. 나는 거칠게 몰아쉬는 숨을 가다듬으며 엘의 기운을 갈구하듯 손을 뻗었다. 뼛속까지 좀먹는 뒤틀린 권능, '아르트'가 손끝에서 파르르 떨렸다. 여신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면, 이 시련의 끝에는 분명 당신의 엄중한 질책이나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안개처럼 자욱한 혼돈의 잔재 너머로, 낮익으면서도 이질적인 실루엣이 보였다.


그것은 인간도, 마족도 아니었다. 대지 위에 서 있으되 그 발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허공인 것처럼 흐릿했다. 나는 멈춰 섰다. 심장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저자의 등 뒤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내가 그토록 증오하고 처단해야 할 헤니르의 정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거기, 누구냐."


목소리가 떨렸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내 눈앞에 서 있는 자의 형태가, 그 흉물스러운 공허의 색채가 내가 거울 속에서 부정해왔던 가장 추악한 가능성을 닮아 있었기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칠흑 같은 어둠이 일렁이는 눈동자. 그 안에는 분노도, 슬픔도, 그리고 내가 그토록 집착하는 여신을 향한 갈망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오직 끝을 알 수 없는 텅 빈 무(無)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거기 있었나."


그가 내뱉은 첫마디는 소름 끼칠 정도로 담담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말을 확인하는 자의 나직한 읊조림이었다. 나는 실소했다. 그가 두른 허물은 신의 사자가 입기엔 너무도 모욕적인 것이었다.


"헤니르의 찌꺼기 주제에, 감히 누구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거지?"


나는 아르트를 응집시켜 날카로운 빛의 창을 형상화했다. 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가엾게 여기는 듯한 시선으로 굽어살필 뿐이었다. 그의 주변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며 검은 파편들이 흩날렸다.


"넘치는 공포... 불안... 이것은 지치지 않나?"


"닥*라! 여신을 배반하고 혼돈에 몸을 던진 괴물이 아는 척하지 마!"


나는 소리쳤다. 내 외침은 공허한 심연 속으로 흡수되어 메아리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손끝이 닿는 곳마다 세계가 지워지고 있었다. 그가 입은 껍데기는 이미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너도 결국, 끝에는 나와 만나게 되겠지..."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직접 울리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저것은 환영도, 단순한 적도 아니다.


여신의 응답을 받지 못한 사자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밑바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가 공허가 되어버린, 또 다른 나의 종착지였다.


비릿한 마기가 섞인 숨을 내뱉으며 나는 창끝을 더 단단히 거머쥐었다. 눈앞의 존재는 나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내 육신 너머, 모든 것이 사라진 먼 지평선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그 무심함이 나의 오만을 자극했다.


"나와 만나게 될 거라고?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여신의 사자를 모독하는구나."


나는 비웃음을 흘리며 한 걸음 내디뎠다. 부서진 아르트의 파편들이 내 주변을 맴돌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 설령 이 몸이 찢겨나가고 혼돈에 먹힐지라도, 나는 그분의 응답을 끝내 이끌어낼 것이다. 엘리오스가 무너지고 모든 피조물이 비명을 지를 때, 여신께서 반드시 나를 보러 내려오시게 만들 테니까!"


나의 선언에도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아주 느리게, 마치 허공을 걷는 듯한 몸짓으로 다가왔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공간은 검게 타들어가며 존재의 흔적을 잃었다.


"아직도... 망설이는 건가?"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다. 감정이 거세된 그 음성이 오히려 나를 거칠게 압박했다.


"망설임? 아니, 이것은 확신이다. 너처럼 포기하고 도망친 패배자와는 다르단 말이다!"


나는 도약했다. 심연에 발을 담근 채 끌어올린 뒤틀린 권능이 아르트의 형상으로 응집되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폭발했다. 여신을 향한 애증과 갈망이 뒤섞인 힘이 서늘하고도 기괴한 빛으로 맺혔다.


슈테헨.


"고통에 몸부림처라!"


허공에서 수천 개의 날카로운 가시가 투영되었다. 그것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공허의 중심, 즉 그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공간을 메운 잔혹한 궤적들이 그를 집어삼킬 듯 옥죄었다. 그러나 나의 권능이 그에게 닿기도 전, 그는 그저 귀찮은 먼지를 털어내듯 손을 가볍게 휘둘렀을 뿐이었다.


챙그랑!


유리 조각이 박살 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나의 권능이 허공에서 산산조각 났다. 충격으로 밀려난 나는 바닥을 긁으며 멈춰 섰다. 믿을 수 없었다. 뒤틀린 신념으로 벼려낸 아르트의 힘조차 저 검은 공허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는 서서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가락 사이로 스며 나오는 것은 죽음보다 더 깊은 정적이었다. 내 몸을 좀먹던 마기가 그의 기운에 호응하듯 미칠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가이스트 헤르샤프트.


정신 세계를 송두리째 뒤트는 이질적인 힘이 눈앞에서 형체화되었다. 전방의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나타난 세 개의 거대한 공허의 구체가 마치 나를 비웃듯 박동했다. 내가 쌓아온 모든 증오와 애정, 여신을 향한 그 처절한 기도가 사실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무’였다고 속삭이는 거대한 허무.


콰아앙—!


공허의 기운들이 일시에 깨져나가며 폭발했다.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정신의 근간이 뒤흔들렸다. 비틀거리는 나의 시야 너머로, 모든 존재의 이유를 부정하는 그의 무감각한 눈동자가 박혔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공포였다.


"받아들여라. 끝에는 오직 공허만이 너를 온전히 안아줄 테니."


그의 목소리가 나의 영혼을 긁어내렸다. 나는 이를 악물며 다시 한번 부서진 권능을 끌어모았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 나는 여신께 나의 파멸을 보여드리지 못했다. 저런 허무에 먹혀 사라지기엔, 나의 원망은 너무나 뜨겁고 선명했다.


손아귀에 힘을 줄수록 아르트의 파편이 살을 파고들었다. 고통은 선명했다. 그 고통만이 내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저 공허의 주인과는 다른 '존재'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지표였다.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산산조각 난 권능을 억지로 이어 붙였다.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웃기지 마라."


내 몸을 감싼 마기가 폭주하듯 검붉은 스파크를 일으켰다. 비릿한 금속성 냄새가 진동했다.


"여신께서 침묵하신다면 그 침묵조차 나의 기도가 될 것이다. 네놈이 말하는 그 평온한 종말 따위, 나에겐 과분한 사치일 뿐이다!"


나는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내 등 뒤로 거대한 마법진이 비틀리며 피어올랐고, 그 안에서 응축된 아르트의 권능이 일곱 자루의 거대한 검으로 화했다.


하임주헨.


사나운 기세로 쏘아져 나간 검들이 하늘을 갈라놓으며 전방의 공허를 향해 쇄도했다. 헤르셔는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그 파멸의 궤적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소란스럽군."


그가 나직하게 읊조리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칠흑 같은 헤니르의 힘이 그의 손아귀에서 거대한 낫의 형상으로 연성되었다.


고트베게쎈 젠즈.


그가 낫을 휘둘러 공간을 반으로 가르자, 세계가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다. 쇄도하던 일곱 자루의 검은 그 서슬 퍼런 궤적에 걸려 힘없이 두 동강 났고, 이내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힘의 격차는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부서진 검의 파편 중 가장 날카로운 조각을 붙잡고, 낫이 지나간 틈을 타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영거리에서의 폭발. 나의 살점이 타들어 가고 뼈가 어긋나는 감각이 전해졌다.


"보고 계십니까, 여신이시여! 당신의 사자가 이렇게 추악하게 망가지고 있습니다!"


광기에 어린 비명과 함께 폭발이 심연을 뒤덮었다. 연기 속에서 나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가슴께가 찢겨나가고 검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나는 웃고 있었다. 드디어 저자의 그 평온한 표정을 무너뜨렸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기가 걷힌 곳에 서 있는 헤르셔는, 상처 하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상처라는 개념조차 그에게는 성립되지 않는 듯했다. 그는 그저 그곳에 '부재'함으로써 나의 모든 타격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너는 왜 그리도... 스스로를 괴롭히지?"


그가 묻는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벌레의 버둥거림을 관찰하는 학자 같은 어조였다.


"이 고통이, 이 증오가 너를 여신에게 인도할 거라 믿나? 아니... 너는 그저 끝이 두려운 것뿐이다. 자신이 한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스스로를 태우고 있는 거야."


"입 닥*...!"



"고민은 끝났을 텐데. 네가 그토록 애타게 부르는 여신은, 이미 이곳에 없다."


그의 말이 내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꿰뚫었다.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 애써 외면해온 진실이 그의 무미건조한 음성을 타고 현실이 되어 쏟아졌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아르트의 빛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떠나지... 않은 건가... 아니면, 떠날 수 없는 건가."


그는 나에게 다가와 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것은 다정한 손길이라기보다, 이미 죽은 고기의 상태를 확인하는 정육점 주인의 손길에 가까웠다.


"하하, 보이시나요? 저는 여기에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어디에도 없군요."


나는 그의 가슴팍을 밀쳐내려 했지만, 내 손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와 나의 거리는 닿을 듯 가까웠지만, 동시에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그는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다. 나의 존재 의미 자체를 소멸시키려 하고 있었다.


머리칼을 쥐어짜는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나의 존재가 어디에도 없다고? 내가 일궈온 이 처절한 파멸이, 여신을 향한 이 불타는 집착이 전부 무의미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바닥을 기어 뒤로 물러났다.


"아니... 아니야...!"


나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가슴팍의 흉터를 짓눌렀다. 마기에 오염된 신의 권능이 비명을 지르며 내 전신을 휘감았다. 살점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뇌를 찔렀지만, 나는 그 통증을 반겼다. 아프다. 괴롭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당신이 뭘 안다고 떠드는 거지? 당신은 그저 사명을 버린 낙오자일 뿐이야! 여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분이 계시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아!"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내 주변의 아르트 파편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어둡고 불길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 이상 신의 사자가 휘두를 만한 광휘가 아니었다. 여신을 위해 세상을 무너뜨리겠다는 뒤틀린 사명이, 마침내 나를 완전한 괴물로 빚어내고 있었다.


"보이십니까? 저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당신이 사랑하는 이 세계를 어떻게 뼛속까지 털어내는지!"


나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광포하게 날뛰는 아르트의 권능을 한데 모아 거대한 창의 형상을 투영했다.


루프.


내가 이곳에 있음을, 나의 원망이 실재함을 증명하듯 투영된 창들을 지면을 향해 무자비하게 내리꽂았다. 창이 박힌 자리마다 공간을 깨트릴 만큼 강력한 힘의 충격으로 심연의 대기가 비명을 지르며 조각났다. 헤르셔는 그 파괴적인 표식들을 보며 아주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것은 감탄이 아니라, 여전히 껍데기에 매달린 생명체를 향한 깊은 연민이었다.


"아직도... 망설이는 건가? 아니면, 그게 너의 최선인가."


"망설임 따위는 버린 지 오래다!"


나는 내리꽂힌 창들의 표식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마력을 폭발시켰다. 공간 자체가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다. 헤르셔의 주변으로 검은 파열음이 연달아 일어났고, 심연의 바닥이 거대한 구멍으로 변했다. 나는 그 파괴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내 육신이 부서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저 저 고요한 얼굴에 단 한 줄기 균열이라도 낼 수 있다면.


먼지 구름 속에서 나는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니, 잡으려 했다. 하지만 내 손은 다시 한번 그의 가슴을 통과해 차가운 허공만을 움켜쥐었다.


"어째서... 어째서 닿지 않는 거냐!"


"너는 '결과'를 쫓고 있지만, 나는 이미 '종말'에 도착해 있기 때문이다."


헤르셔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된 채 허상을 붙들고 발악하는 가엾은 피조물에 불과했다. 그는 나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애처롭군. 여신의 빛은 너를 향하지 않는다. 네가 세상을 무너뜨려도, 네가 스스로를 불살라도... 그분은 이미 너를 잊었다."


"하하하하! 그럴 리 없어! 내가 이렇게나... 이렇게나 당신을 원망하고 있는데!"


나의 웃음소리가 심연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명백한 광기였다. 나는 내 안의 엘의 기운을 남김없이 쥐어짰다. 여신께서 나를 보시지 않는다면, 보실 수밖에 없을 만큼 거대한 파멸을 일으키면 된다. 설령 그 끝이 구원이 아닌 영원한 저주일지라도, 침묵보다는 나을 터였다.


나는 내 몸 자체가 거대한 아르트의 핵이 된 것처럼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타오르는 아르트의 잔해였다. 시야는 이미 붉은 갈증으로 가득 찼고, 고동칠 때마다 폐부가 찢어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그러나 멈추지 않고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헤니르의 심연조차 오염시킬 듯이 요동쳤다.


"보이십니까... 여신이시여! 당신이 침묵으로 일관하신다면, 나는 이 세계를 당신의 눈앞에서 조각내 버리겠습니다!"


나의 외침은 비명이 되어 돌아왔다. 광기에 젖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자제력을 잃은 권능이 내 피부를 뚫고 솟아올라 거대한 가시가 되었다. 이제 나는 사자가 아니었다. 사명을 집어삼키고 스스로 사명이 되어버린 괴물, 여신에게 닿기 위해 지옥의 불길조차 뒤집어쓴 가엾은 화신이었다.


헤르셔는 그 아비규환의 중심에서 여전히 고요했다. 그는 몰아치는 나의 폭풍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발걸음마다 그를 감싸고 있던 '허물'이 조각나 흩어졌다.


"드디어... 때가 된 건가."


그가 읊조렸다. 그것은 예언의 성취를 목격하는 자의 어조였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꿰뚫으려 달려드는 나의 아르트 가시들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그 가시들은 그의 몸에 닿는 순간 본래의 성질을 잃고 공허의 일부로 동화되어 사라졌다.


"비키란 말이다! 당신의 그 잘난 공허 따위, 나의 원망보다 깊을 리 없어!"


나는 남은 힘을 전부 끌어모아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그것은 생명체의 온기가 아니라, 차갑게 식어버린 재의 감촉이었다. 나는 그를 밀쳐내며 바닥을 짓눌렀다.


"하하하하! 닿았다... 드디어 닿았어! 들리나, 헤니르의 찌꺼기여! 나의 증오가 네놈의 그 오만한 침묵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가엾게 여기는 그 눈빛으로, 나의 타들어 가는 눈동자를 깊게 응시했을 뿐이다.


"그래... 아주 개운한 기분이군. 너의 그 뜨거운 불꽃이 결국은 나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었으니."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색의 기운이 나의 아르트와 엉겨 붙기 시작했다. 나의 파괴적인 힘이 그에게 흡수될수록, 헤르셔의 존재감은 더욱 거대해졌다. 그는 나의 폭주를 막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있었다. 마치 바다가 빗방울을 받아들이듯, 나의 모든 고통과 집착을 자신의 공허 속으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무슨...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이건 나의 힘이다! 여신께 바칠 나의 죗값이란 말이다!"


"어차피 모두 무로 돌아갈 것을... 너는 왜 끝까지 쥐려 하는가."


헤르셔의 손이 내 가슴의 흉터 위에 놓였다. 그 순간, 내 몸을 지탱하던 모든 분노와 마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이한 상실감이 나를 덮쳤다. 힘이 빠진 다리가 꺾이며 나는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보이십니까!?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리도 추운 것입니까..."


나의 마지막 외침은 젖어 있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여신을 향해 뻗었던 손은 허공에서 힘없이 떨어졌고, 나를 태우던 불길은 이제 차가운 재가 되어 흩날렸다. 헤르셔는 쓰러진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마치 잠든 아이를 달래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 시작될 것이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완전한 안식이."


그의 선언이 고요한 파동이 되어 뇌를 훑고 지나갔다. 나를 불사르던 그 지독한 열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감촉조차 비현실적으로 희미해진 채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의 세계가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아는 그 어떤 마법이나 권능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생전 처음 마주하는 불길하고도 고고한 파동이었다. 사명을 위해 온갖 혼돈을 겪어온 나조차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낄 만큼 이질적인 힘.


저그린느.


그를 중심으로 허무와 공허로 가득한 심연의 공간이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검은 형상들이 사방을 포위하듯 둘러싸더니, 내가 서 있던 현실의 공간을 순식간에 융해시키며 나의 존재를 잠식해 들어왔다. 어떤 저항도 소용없었다. 이윽고 사위가 정적에 잠기며, 마치 날카로운 종유석이 가득 찬 기괴한 동굴을 연상케 하는 새로운 영역이 형성되었다.


그 세계의 중심에서 헤르셔는 하반신이 바닥의 그림자와 동화된 듯한 고고한 형태로 서 있었다. 그것은 파괴가 아닌, 그만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의 재창조였다.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칠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헤니르의 색채가, 사실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안식'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결국... 닿지 못한 건가..."


갈라진 목소리가 힘없이 흩어졌다. 여신을 위해 세상을 무너뜨리겠다던 나의 맹세는, 이제 부서진 아르트 조각들처럼 의미를 잃고 뒹굴었다. 파멸조차 완성하지 못한 사명은 허무보다 무거웠다. 나는 그 무거운 껍데기를 끌어안고 침몰하고 있었다.


헤르셔는 천천히 몸을 숙여, 이미 생기를 잃어가는 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승리감도, 조롱도 없었다. 오직 먼저 끝에 도달한 자가 느끼는 깊고 적막한 동질감만이 머물러 있었다.


"너도 결국, 끝에는 나와 만나게 되겠지..."


그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파고드는 대신, 이번에는 차가운 얼음처럼 시린 구원이 되어 나를 감쌌다. 나는 실소했다. 여신께 벌을 내려달라 애원하던 나의 기도가, 고작 사명을 저버린 또 다른 나의 품 안에서 이루어지다니. 이 얼마나 지독한 농담인가.


"떠나지... 않은 건가..."


"나는 이곳에 있으니. 언제까지나, 너의 가장 가까운 종말로서."


그의 신체가 서서히 일렁이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붕괴가 아니라 확장이었다. 그가 재창조한 공허의 영역이 나의 존재를 완전히 잠식해 들어왔다. 고통은 없었다. 다만 나라는 존재를 정의하던 모든 기억과 원망, 여신의 이름마저 하나둘씩 지워져 갈 뿐이었다.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여신의 찬란한 광휘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에 가장 개운한, 완벽한 어둠이었다.


"여신이시여... 저는..."


부르려던 이름의 끝이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위해 이토록 아파했는지조차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무거운 사명의 족쇄가 풀리고, 나는 그가 말했던 진정한 구원의 영역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래... 아주 개운한 기분이군..."


심연의 가장 깊은 곳,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디에든 존재하는 공허의 주인만이 그곳에 남았다. 그가 딛고 선 자리에는 더 이상 비고트도, 헤르셔도 없었다. 오직 모든 시작과 끝이 하나로 섞인, 영원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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