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금조Lv.99
- 작성일 2026.09.1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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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녀를 봤을 때,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이상한 숲이었다. 눈을 뜨자 처음 보는 나무들이 있었고, 공기는 익숙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정령의 기운도 느껴졌지만 내가 알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상한 게 있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는 처음부터 서 있었던 건 아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발견했고, 한동안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했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쉽게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무 앞에 무릎을 꿇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당신들의 힘을 빌리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정확히는 몰랐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미 곁에 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
그다음 말은 더 오래 남았다.
내가 강해질수록 내 곁의 사람들은 더 안전해지는 걸까요.
아니면 그저 내가 더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 것뿐일까요.
그 순간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 나랑 정말 닮았다. 얼굴 때문이 아니라 고민하는 방식이.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으니까. 힘이 생길수록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을 지킬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당연한 의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할 수 있으니까 해야 하고, 내가 막을 수 있으니까 막아야 하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으니까 앞에 서야 하고. 그런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가끔은 내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어진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혼자 고민하면 힘들 텐데."
말하고 바로 후회했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녀가 돌아섰고 검이 번쩍였다.
아,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물론 피할 자신은 있었다. 아마도. 조금은.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보고 멈췄다. 나도 멈췄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똑같았다. 정말로. 눈매도, 귀도, 머리카락도, 손도 전부. 내가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저쪽은 차가웠다. 정확히는 차가운 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군가를 싫어해서 벽을 만드는 게 아니다. 가까이 두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이름을 물었을 때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황혼."
처음에는 진짜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바로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본명도 아니다. 숨긴 것이다. 나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조금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황혼. 그럼 나는 뭐라고 하지.
하늘을 봤다. 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새벽."
"……새벽?"
"응. 황혼 다음에는 새벽이잖아."
그리고 바로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황혼 다음에는 밤이다. 그녀가 그대로 지적했다. 조금 민망했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럼 밤까지 기다려야 해?"
그녀가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봤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다. 그래도 그때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황혼 다음에 바로 새벽이 오지 않아도 된다. 밤이 있어도 된다. 기다리면 된다.
그래서 말했다. 기다리는 건 자신 있다고.
그때는 정말 장난 반이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 말이 이상하게 진짜가 됐다.
황혼은 나한테 가까이 오라고 한 적이 거의 없다. 처음부터 늘 거리를 만들었다.
두 걸음.
딱 그 정도.
처음에는 나도 조금 서운했다. 나랑 똑같은 얼굴인데 이상하게 나만 혼자 친한 척하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래도 억지로 가까이 가고 싶지는 않았다. 황혼이 한 걸음 물러나면 나도 한 걸음 물러났다. 그게 편해 보였으니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됐다. 황혼은 계속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정령과 이야기할 때, 사람들에게 인사할 때, 활을 잡을 때, 웃을 때. 항상 못 본 척하면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자주 나를 챙겼다. 말로는 아니었다. 늘 행동으로. 위험한 곳은 자기가 먼저 갔고, 내가 다칠 것 같으면 먼저 막았다. 내가 배고프다고 하면 마을로 갔고, 내가 다쳤는지 확인할 때는 차갑게 말하면서도 끝까지 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말해버렸다.
"황혼은 생각보다 따뜻하네."
정말 그렇게 느꼈으니까.
황혼은 바로 부정했다. 당연할 줄 알았다. 그래도 조금 웃겼다. 따뜻한 사람이 자기가 따뜻한 줄 모르는 게.
가장 이상했던 건 같이 싸울 때였다.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황혼이 어디로 움직일지 알 수 있었고, 내가 쏘면 어디로 파고들지도 알 수 있었다. 내가 길을 만들면 그 틈을 정확히 들어왔다.
무서울 정도로 잘 맞았다. 처음에는 같은 사람이니까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우리는 같은 시작에서 다른 쪽을 본 사람들이었다. 나는 멀리서 길을 열었고, 황혼은 가까이 들어가 빈틈을 찔렀다. 내가 놓치는 걸 황혼이 봤고, 황혼이 닿지 못하는 곳을 내가 맞혔다.
그게 좋았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혼은 가끔 나를 보면서 아주 잠깐 표정이 굳었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지만 나중에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저 사람은 익숙해지는 걸 무서워한다.
그걸 확실히 느낀 건 동쪽 숲에서였다.
정령들이 폭주했고, 뿌리 아래에서 엘의 힘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가 화살로 길을 열면 황혼이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한 번도 맞춰본 적 없는 방식인데 이상할 정도로 잘 맞았다. 말하지 않아도 움직임이 겹쳤다.
그게 조금 신기했고, 조금 기뻤다.
그리고 마침내 균열이 보였다. 뿌리 사이의 아주 작은 틈. 힘은 전부 거기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황혼을 불렀다.
"황혼."
"왜."
"저 틈."
황혼도 이미 보고 있었다.
"막을 수 있겠어?"
"해봐야지."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같이?"
그 순간 황혼이 멈췄다. 정말 잠깐이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표정이 바뀌었다. 아까까지 싸우던 얼굴이 아니었다. 무언가 오래된 걸 본 사람처럼 굳었다.
나는 괜히 말을 잘못했나 싶었다.
"황혼?"
그러자 황혼이 바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할게."
"뭐?"
"뒤로 가."
처음에는 위험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래도 같이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뒤로 가."
이번에는 확실했다.
저건 부탁이 아니라 거리였다.
나는 황혼을 봤다.
"혼자 하려고?"
"그래."
"왜?"
"그게 더 빠르니까."
거짓말이었다. 나도 알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같이 움직이는 편이 훨씬 빨랐다. 그걸 황혼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 서운했다.
또 시작이구나. 가까워지면 한 걸음 물러나는 거. 그래도 나는 물러났다. 황혼이 싫다고 했으니까.
"알겠어."
그런데 그 말을 듣자 황혼의 표정이 오히려 더 굳었다.
"그렇게 쉽게 물러날 거면 처음부터 왜 왔지?"
나는 정말 당황했다. 돌아가라고 한 건 황혼이었다. 그래서 물러났는데 이제는 왜 물러나냐고 한다.
잠깐 황혼을 바라봤다. 그때 처음 알았다.
아. 이 사람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구나. 가까이 오면 무섭고. 멀어지면 싫은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이상하게 화는 나지 않았다. 조금 슬프긴 했다. 그래도 이해는 됐다.
"황혼이 물러나라고 했으니까."
황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황혼이 싫다고 하는 걸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아."
그건 진심이었다. 억지로 가까워져 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 황혼이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황혼은 두 걸음 물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험한데 모른 척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황혼이 나를 봤다.
"위험해지면 도울 거야."
"필요 없어."
"그건 내가 정할게."
그 순간 황혼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나는 아주 조금 웃었다.
"그 정도는 마음대로 해도 되지?"
예전에 황혼이 나한테 했던 말이었다.
마음대로 해.
이상하게 그 말이 좋았다. 완전한 허락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절도 아니었다. 황혼이 만든 선 안에서 내가 있을 수 있는 작은 공간.
나는 계속 거기 있으려고 했다.
황혼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잠시 뒤 말했다.
"……거기 있어."
"응."
나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정말로.
한 걸음도 더 가지 않았다.
황혼은 균열 쪽으로 다가갔고, 나는 활을 들고 뒤에서 지켜봤다. 사실 당장 옆으로 가고 싶었다. 힘이 너무 강했다. 황혼 혼자 감당하기에는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기다렸다. 정말 위험해지는 순간만. 그때는 무슨 말을 듣더라도 갈 생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터졌다. 황혼의 몸이 뒤로 밀렸고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였다.
"황혼!"
"오지 마!"
나는 그대로 멈췄다.
한 걸음.
딱 한 걸음 나가려던 상태로.
이를 악물었다. 싫었다. 그렇게 위험한데도 혼자 버티는 게. 그런데도 황혼은 결국 균열을 닫았다. 힘이 가라앉았고 정령들도 조금씩 진정됐다.
황혼이 무릎을 꿇었다.
나는 다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멈췄다.
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멀리서 상태를 확인했다. 호흡은 거칠지만 움직일 수는 있다. 괜찮아 보였다. 적어도 당장은.
그래서 거기 있었다.
황혼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눈이 마주쳤다.
"끝났어."
"응."
"마을로 돌아가."
이번에도 나는 조금 망설였다.
"황혼은?"
"조금 있다 갈 거야."
"같이 안 가?"
"그래."
이번에는 이해했다. 지금은 정말 혼자 있고 싶은 거구나.
"알겠어."
나는 돌아섰다. 몇 걸음 걸었다. 솔직히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황혼이 괜찮은지, 혹시 쓰러지는 건 아닌지.
그래도 참았다.
믿어보기로 했다.
황혼이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날 이후 황혼은 조금씩 더 멀어졌다. 처음에는 같이 가자는 말을 거절하는 정도였다. 그다음에는 필요한 말만 했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아예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조금 아팠다. 당연히.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다. 왜 갑자기 그러는지 묻고 싶었고,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궁금했다.
그런데 동쪽 숲에서 봤던 황혼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가까이 오면 물러나고. 내가 물러나면 또 이상하게 흔들리던 얼굴. 황혼은 나를 싫어해서 그러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가까워지는 게 무서운 걸지도 모른다.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도 그냥 말했다.
"알겠어."
그리고 기다렸다.
그런데 며칠 뒤 나는 그 말이 단순한 거리두기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공존의 축제가 끝나갈 무렵, 세계의 경계가 다시 크게 흔들렸다. 정령들이 폭주했고 마을까지 위험해졌다.
황혼과 나는 다시 함께 싸웠다.
이상하게도 아무리 거리를 두어도 전투만 시작되면 예전처럼 맞았다. 황혼이 앞으로 들어가면 내가 길을 열었고, 내가 화살로 적의 움직임을 막으면 황혼은 정확히 그 틈으로 파고들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어디로 움직일지, 어떤 순간에 상대를 맡겨도 되는지.
그게 좋았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좋았다. 황혼이 나를 밀어내기 시작한 뒤에도 싸우는 순간만큼은 예전처럼 느껴졌으니까.
정령 하나가 내 뒤로 접근했을 때 황혼이 먼저 외쳤다.
"뒤!"
나는 몸을 낮췄다. 검이 내 머리 위를 지나 정령을 베었다.
"고마워."
"집중해."
"하고 있어."
"그럼 뒤도 봐."
나는 별생각 없이 말했다.
"황혼이 봐줬잖아."
말하고 나서 황혼의 표정이 굳었다. 아차 싶었다.
나는 정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황혼이라면 봐줄 거라고. 나도 황혼의 뒤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게 함께 싸우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황혼에게는 그 당연함 자체가 무서웠던 것 같다. 싸움이 끝났을 때 황혼의 왼쪽 어깨가 신경 쓰였다. 아까 공격을 피하는 순간 조금 스쳤던 걸 봤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황혼."
대답이 없었다.
"다친 데 없어?"
"없어."
"아까 왼쪽 어깨에."
"괜찮아."
괜찮지 않아 보였다.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가려고 했다.
그 순간 황혼이 뒤로 물러났다.
발이 멈췄다.
또 이 거리였다.
내가 다가가면 황혼이 만드는 거리.
"황혼?"
황혼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결심하는 것처럼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는."
목소리가 조금 잠겼다.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다시는 나에게 다가오지 마."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정령들의 울림도 들렸고, 무너진 물건을 옮기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부 멀어진 것 같았다.
다시는.
그 말이 가장 먼저 남았다.
이번에는 따라오지 말라는 말과 달랐다. 오늘만 혼자 있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오지 말라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오지 말라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상처받았다.
꽤 많이.
나는 황혼이 나를 싫어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 걸음 물러나면 황혼이 괜찮아질 때까지 거기 있으면 된다고. 그런데 저 말을 듣는 순간 처음으로 자신이 없어졌다.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혹시 정말 싫었던 건 아닐까. 내가 계속 옆에 있으려고 한 게 부담이었던 건 아닐까.
물어보고 싶었다. 왜냐고. 내가 뭘 잘못했냐고. 정말 내가 싫어진 거냐고.
그런데 황혼은 나를 ** 않았다.
그 얼굴을 보고 나니 묻지 못했다.
지금 붙잡으면 더 멀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알겠어."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말하고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예전의 알겠어와 달랐다. 예전에는 기다리겠다는 뜻에 가까웠다. 이번에는 정말 물러나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돌아섰다. 몇 걸음 걸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혹시 황혼이 나를 보고 있는지, 혹시 붙잡지는 않을지.
하지만 돌아** 않았다. 다시는 다가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날부터 나는 정말 다가가지 않았다. 멀리서 황혼이 보여도 가지 않았고, 같은 숲에 있어도 반대편 길을 골랐다. 도움이 필요한 흔적이 보이면 정리해두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이제는 내가 어느 정도까지 가도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예 선을 넘지 않는 쪽을 택했다.
황혼이 만든 거리보다 조금 더 멀리.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완전히 떠날 수는 없었다. 같은 세계에 있는 동안은, 같은 마을에 있는 동안은 어쩐지 계속 신경 쓰였다.
어느 날 광장에서 전에 만났던 아이를 다시 봤다. 아이는 나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손에는 작은 꽃이 들려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며칠 전 내가 머리에 꽂았던 꽃이 떠올랐다.
그리고 황혼도.
나는 잠시 고민했다. 직접 주러 갈 수는 없다. 다가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는 싫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꽃 하나를 맡겼다.
"혹시 나랑 똑같이 생긴 언니 만나면."
"황혼 언니?"
나는 웃었다.
"응. 그 언니."
"이거 전해줄래?"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꽃을 건넸다. 그러고 나서 조금 고민했다. 이것도 다가가는 걸까. 약속을 어기는 걸까.
하지만 직접 가지는 않았으니까. 꽃 하나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은 그냥 황혼이 그 꽃을 받아줬으면 했다. 버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 정도만 바랐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황혼은 오지 않았다. 나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 처음 만났던 숲으로 갔다. 혹시 돌아갈 방법이 생길까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곳에 있으면 황혼을 다시 만날 것 같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랬다.
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 빠르다. 조금 급했다.
처음에는 누군가 했는데 금방 알았다. 황혼이었다. 그 순간 웃고 싶었다. 정말로 너무 좋았다. 그래도 티 내면 도망갈 것 같아서 참았다.
황혼이 내 앞에 섰다.
두 걸음.
늘 있던 거리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이름을 먼저 불렀다.
"……새벽."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좋았다.
황혼은 한참 말하지 못했다. 나는 기다렸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말했다.
"네가 없으니까…… 조용하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정말 황혼답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을 저렇게 하는구나.
그래서 물었다.
"그럼 조금 시끄럽게 해줄까?"
"……조금만."
그때는 정말 많이 웃고 싶었다. 겨우 참았다. 아마 표정에는 다 드러났을 것이다.
그날 황혼이 전에 했던 말을 취소한다고 했을 때도 비슷했다. 다시는 다가오지 말라는 말. 그걸 취소한다고 했다.
나는 바로 가까이 가고 싶었다. 그래도 조금씩 움직였다. 혹시 또 불편할까 봐.
한 걸음.
멈췄다.
"이 정도는?"
황혼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 순간 알았다.
괜찮구나.
이제는.
그다음 날 길이 열렸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길. 보고 바로 알았다. 돌아갈 수 있다. 좋은 일이었다. 정말로.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고 해야 할 일도 있었다. 그런데 기쁘지만은 않았다.
황혼이 먼저 말했다.
가라고.
조금 서운했다. 그래서 장난처럼 말했다.
바로 보내네.
그런데 잠시 뒤 황혼이 말했다.
"아쉬워."
순간 대답하기 어려웠다. 황혼이 그런 말을 먼저 할 줄 몰랐다. 그래서 나도 말했다.
나도 그렇다고.
그걸 말하고 나니까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리고 진짜 이름을 말했다.
레나.
황혼도 똑같았다.
레나.
웃음이 났다. 정말 같은 사람이었다. 다른 길을 걸었을 뿐. 그래도 나는 황혼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레나라고 부르면 너무 많은 뜻이 들어 있다. 나. 황혼. 어쩌면 다른 어딘가의 수많은 나. 하지만 황혼이라고 부르면 딱 한 사람만 떠오른다. 조용하고, 차갑게 말하고, 생각보다 따뜻하고, 다가오지 말라고 해놓고 결국 자기가 먼저 찾아오는 사람. 그래서 그 이름이 좋았다.
돌아가기 직전 황혼이 말했다. 다음에는 자기가 찾아오겠다고. 그 순간 정말 놀랐다. 내가 기다리겠다고 말한 건 처음부터였다. 하지만 황혼이 찾아오겠다고 한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을게."
이번에는 농담이 아니었다.
빛 안으로 들어가면서 마지막까지 황혼을 봤다. 표정은 여전히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조금 아쉬워하고 있다. 조금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조금 웃고 있다. 그걸로 충분했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익숙한 숲이었다. 내가 알던 정령들이 몰려왔다. 바람도, 나무도, 공기도 전부 원래대로였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예전과 똑같은 곳인데 조금 달라 보였다. 아마 내가 달라진 거겠지.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침이었다. 빛이 나무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황혼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마 혼자 숲을 걷고 있겠지. 그러다가 누가 말 걸면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그래도 결국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가끔, 정말 가끔은 내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걸로 충분하다.
황혼은 여전히 황혼이다. 조용하고, 차갑고, 혼자 걷는 게 익숙한 사람.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황혼은 혼자여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누군가를 곁에 두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방법은 내가 알고 있다.
밤이 조금 길어도 괜찮다.
새벽은 없어지지 않으니까.
나는 웃었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걸었다.
언젠가 정말로 다시 만난다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묻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름이 뭐냐고.
그냥 부르면 된다. 황혼이라고. 그러면 아마 저쪽에서도 나를 부를 것이다. 새벽이라고. 그날이 오면 이번에는 두 걸음이나 떨어져 걷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황혼이 또 한 걸음 물러난다면.
그때는 한 걸음만 기다려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