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비할게Lv.5
- 작성일 2025.05.0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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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요함 속에서 루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서서히 열렸다. 익숙한 어둠, 익숙한 침대. 루는 잠시 숨을 고르며 희미하게 보이는 천장을 응시했다. 나른함과 평화로움. 짐은... 지금 이 순간이 좋구나. 곁에서는 라비가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 작은 온기가 어둠 속에서 유일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평화로운데, 갑자기 엄습한 불안감.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려던 루는 순간, 등골을 타고 오르는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어둠, 자신을 감싸는 고요함, 그리고 옆에서 들리는 라비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문득, 아주 오래전, 깊은 어둠 속에 홀로 갇혀 있던 악몽 같은 기억이 찰나의 섬광처럼 머릿속을 할퀴고 지나갔다. 힘없이 쇠사슬에 묶여 있던 나약했던 시절의 기억. 통제할 수 없다는 불안감, 끝없는 고독의 무게가 심장을 빠르게 짓눌렀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이 귀청을 때리는 듯했다. 불안감이 어둠 속에서 형체를 갖추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듯했다.
'아니야... 진정해.'
루는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짐은... 이제 그때의 짐이 아니다. 심연의 군주 루. 그 어떤 어둠도, 그 어떤 공포도... 짐을 가둘 수 없어.'
애써 정신을 다잡았지만,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옆에서 잠든 라비의 작은 손이 루의 팔에 살짝 닿았다. 무의식적인 잠결의 행동이었겠지만, 그 작은 온기가 루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래. 혼자가 아니야. 라비가... 곁에 있잖아. 라비의 온기에 기대어, 루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하지만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이 불편함을 해소해야 했다. 그래, 물을 마시자. 단순한 행위가 불안감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루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발이 닿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라비가 깰까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루는 그림자처럼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에 닿자, 짓눌렸던 불안감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물 한 잔만 마시면 된다. 단순한 목표에 집중하며, 루는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희미한 달빛만이 비추는 복도를 걷는 동안, 루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더 긴장되어 있었다. 내면의 불안함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루는 애써 과거의 그림자를 떨쳐내려 노력했다.
'짐은 루. 심연의 군주 루다. 그 어떤 어둠도, 그 어떤 두려움도 짐을 가둘 수 없어.'
라비가 뒤척이며 잠에서 깼다. 으음... 하고 길게 기지개를 켜던 라비는 옆자리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이상해. 라비는 부스스한 머리로 손을 뻗어 옆을 더듬었다. 따뜻하고 익숙한 온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차가운 시트의 감촉만이 느껴졌다.
"응? 루?"
처음에는 잠결에 루가 잠깐 화장실에 갔나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라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가 혼자 나갔어! 이 시간에? 라비는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루가 라비를 깨우지 않고 몰래 나간 것은... 그래! 분명 숨바꼭질이야! 라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얇은 민트색 잠옷이 살랑이며 다리에 감겼다. 어둠 속에서도 라비의 눈은 보물찾기를 나선 아이처럼 반짝였다. 신나! 루랑 숨바꼭질이다! 라비는 발끝으로 사뿐사뿐, 고양이처럼 조용하게 방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루가 어디 숨었을까? 거실? 아니면... 서재?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는 어두웠지만 라비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신나는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 때문이었다.
"루~ 어디 숨었어~? 라비가 간다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라비는 복도를 따라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커튼 뒤에 숨어있을까? 아니, 루는 그런 유치한 곳에 숨지 않을 거야. 라비는 거실로 향했다. 넓은 거실을 꼼꼼히 살폈지만 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서재에 갔나? 책 읽고 있을지도 몰라! 라비는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열어보았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책장들만이 줄지어 서 있을 뿐, 루는 그곳에도 없었다. 그럼 어디에 있지?
라비는 잠시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집 안은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라비의 직감이 한 곳을 가리켰다. 아! 주방인가! 루가 배고플지도 몰라! 그래, 분명 주방일 거야! 라비는 활기차게 주방으로 향했다. 발소리가 들릴까 봐 톡톡 뛰는 대신 발바닥 전체를 사용해서,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바닥에 착지하며 걸었다. 주방 문 앞에 다다르자 문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라비는 옳지! 찾았다! 생각하며 문틈으로 빼꼼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방 한가운데, 루가 물잔을 들고 서 있었다. 물을 마시려는 듯 보였지만, 잔은 입가에 닿지도 못한 채 공중에 멈춰 있었다. 루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눈동자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 공포, 그리고 희미한 슬픔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라비는 숨을 멈췄다. 숨바꼭질이 아니었어. 루가... 아파 보여. 장난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라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찼다. 라비는 천천히,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섰다.
"루...?"
작게 불리는 소리에 루의 몸이 화들짝 떨렸다. 루는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려 했지만, 라비는 이미 다 보았다. 루는 애써 평소의 위엄 있는 표정을 지으며 라비에게 말했다.
"후... 라비였느냐. 어째서 깨어있는 것이냐."
"루가 없었어! 라비 혼자 있었어!"
라비는 루에게 다가가 루의 손을 잡았다. 루의 손이 차가웠다. 라비는 루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루, 괜찮아? 어디 아파?"
루는 라비의 따뜻한 손길에 잠시 눈을 감았다. 불안했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라비가... 곁에 있구나.
"...아니다. 별것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 그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온 것뿐."
루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지만, 라비는 루의 눈빛에서 여전히 불안함을 읽었다. 라비는 루의 손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
"거짓말. 루, 아까 표정 안 좋았어! 라비 다 봤단 말이야!"
라비는 루의 팔에 매달리듯 기대며 루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루... 라비는 루가 아픈 거 싫어... 혼자 가지 마..."
루는 라비의 말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숨길 수 없지. 이 아이는 너무 솔직하고, 너무 사랑스럽다. 루는 라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후... 미안하구나. 잠시... 예전 생각이 나서."
루는 더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라비도 더 묻지 않았다. 라비는 그저 루가 아팠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곁에 있어 주고 싶다는 마음만을 표현했다.
"라비랑 같이 가! 혼자 다니지 마!"
"하... 그래. 알겠다. 같이 가지. 이제 잠자리로 돌아가자."
루는 물잔을 내려놓고 라비의 손을 잡았다. 라비는 환하게 웃으며 루의 손을 꼭 잡았다. 주방의 불을 끄고 두 사람은 다시 어두운 복도를 걸어 방으로 돌아왔다. 아까와 달리 루의 발걸음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라비의 따뜻한 손길과 존재가 불안을 녹여준 덕분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나란히 눕자, 라비는 다시 루에게 파고들었다. 루는 라비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헤헤! 루! 좋은 아침!"
라비는 루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품에 안겼다. 루는 그런 라비를 꼭 안아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새로운 하루가 그들 앞에서 빛나고 있었다